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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갤러리

권찬희 작가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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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찬희 작가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2019 여정 Story 물들다>

 

자연스럽게 떠나는 우리의 여정에서

 

여유롭고 넉넉한 가슴에 뜨겁게 담아 낼수있어 행복했던 여정!

 

고마운 소재들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고....

 

응원해주는 큰 마음들에 깊은 감사를 하며....

 

꽃이 나인듯

 

단풍이 나 인듯

 

나무가 나 인듯

 

많은 이야기를 피우고 피우리라.

 

- 연두빛 햇살좋은 4월에

 

 

 

 

권찬희 작가님원광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를 졸업하셨어요~~~^^

 

권찬희 작가님개인전 11회, 단체전은 다수로 전시를 하셨어요~~~^^

 

현재는 한국미술협회, 노령회 회원, 전북여성미술인협회 회원, 벽골미술대전, 전라북도미술대전

초대작가이셨어요~~~~^^

 

 

 

 

아래 부터는 권찬희 작가님 작품들이에요~~~~~^^

 

 

장성호의 가을 | mixed media on canvas | 65 x 162cm

 

 

 

 

 


적상산의 가을 | mixed media on canvas | 99.5 x 162cm

 

 

 

 

 

피아골의 가을여운 | mixed media on canvas | 65 x 162cm

 

 

 

 

 

여정 Story | mixed media on canvas | 44 x 53cm

 

 

 

 

 

여정 Story | mixed media on canvas | 116.7 x 91cm

 

 

 

 

 

경천 화암사 가는날 | mixed media on canvas | 65 x 172cm

 

 

 

 

 

Peacefully | watercolor on paper | 29.5 x 76cm

 

 

 

 

 

여정 Story | mixed media on canvas | 41 x 53cm

 

 

 

 

 

피아골 입구 연곡사의 가을 | mixed media on canvas | 85 x 182cm

 

 

 

 

여정 Story | Watercolor on paper | 116.7 x 91cm

 

 

 

 

 

여정 Story | mixed media on canvas | 85 x 182cm

 

 

 

 

 

칠불사의 꽃비 | mixed media on canvas | 99.5 x 190cm

 

 

 

 

 

장수방화동의 여름 | mixed media on canvas | 65 x 172cm

 

 

 

 

 

The Starry Night | watercolor on paper | 41 x 121.2cm

 

 

 

 

 

여정 Story | Watercolor on paper | 130.3 x 97cm

 

 

 

 

 

<내가 본 전시회 느낌>

 

권찬희 작가님 작품들의 주제는 나무 꽃 등 자연물을 주로 그리셨어요.

 

권찬희 작가님 작품들은 어떻게 보면 추상적이고 어떻게 보면 사실적이어서

보는 내내 재미있었어요~~~^^

 

권찬희 작가님의 작품을 보게 되어서 행운이였고 다음 전시회가 또 기대가 되네요.

 

 

 

 

 

이 작품 사진들은 작가의 촬영 허락으로 제작 하였습니다.  
이 작품 사진들 안의 그림들은 작가의 허락 없이 무단 사용을 할 수 없습니다. 

This picture was filmed under the artist’s agreement.  
The pictures  in it may not be used without the artist’s permission.

 

 

 

 

 

아래는 인사아트갤러리 위치에요~~~~^^

 

 

 

 

 

 

 

아래는 권찬희 작가님과 같은 느낌의 야수파를 찾아보았어요~~~~^^

 

 

<야수파[ fauvisme, 野獸派 ]>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일어난 미술운동.

 

포비슴의 역어(譯語)이다. 주정적(主情的)인 경향을 대표하는 야수파운동은 엄밀한 의미에서 강령과 이념을 가지고 출발한 유파라기보다 인상파나 신인상파의 타성적인 화풍에 반기를 든 젊은 작가들의 일시적인 만남에서 형성되었다. 통설로는 당시 미술평론가 루이 보셀이 1905년 살롱 도톤(Salon d'Automne)에 출품되었던 마르케의 15세기풍의 청동조각을 보고 "야수(포브)의 우리에 갇혀 있는 듯한 도나텔로(르네상스 초기의 이탈리아 조각가)"라고 평한 데서 포비슴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한다. 그러나 마티스부인과 보셀 등의 증언이 모두 달라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1905년 《일뤼스트라시옹》지() 11월호에 당시 살롱 도톤의 회장을 야수의 조교사에 비유한 풍자화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해 가을에는 '포브'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운동의 동인은 귀스타브 모로의 문하생이었던 앙리 마티스, 알베르 마르케, 조르주 루오, 앙리 망갱 등과 보나-엘의 교실에 있었던 라울 뒤피, 그리고 모리스 드 블라맹크, 앙드레 드랭, 키스 반 동겐, 장퓌이, 에밀 프리에즈 등이었으며 큐비즘 창시자의 한 사람인 조르주 브라크도 1907년 살롱 도톤에서 이들과 관계를 가졌다. 이들 가운데 마티스가 지도적 역할을 했으며 새로운 회화를 지향하는 같은 세대의 공감을 얻었다. 특히 1901년 베르넴 쥔 화랑에서 개최된 고흐전과 모로의 자유로운 회화교육은 야수파운동의 큰 계기가 되었다. 이들의 제작태도에는 마티스와 마르케가 같은 모델, 같은 모티프를 동시에 그린 것과 같은 공통점이 많았다. 야수파의 자연발생적인 집단의 형성과 그들의 주정적인 체질은 같은 시대에 나타난 입체파의 주지적인 경향과 대립하였다. 마티스는 1908년 《그랑드 레뷔》지에 야수파의 논리적 주장을 펴고 있으나 이 때는 이미 그 집단이 해체된 뒤였다.

 

1905년부터 1908년까지의 작품을 보면, 이들은 아카데미즘에 대항하며 인상파 이후의 새로운 시각과 기법을 추진하기 위해 순색(純色)을 구사하고 빨강·노랑·초록·파랑 등의 원색을 굵은 필촉을 사용하여 병렬적으로 화면에 펼쳐 대담한 개성의 해방을 시도하였다. 새로운 색의 결합에 대한 기본적인 의도 때문에 이를테면 공기·수목 등에 붉은색을 사용하는 등 전통적인 사실주의의 색채체계를 완전히 파괴했으며 명암·양감 등도 파기하였다. 격렬한 정신의 표현과 강렬한 색채는 고흐의 작품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으나, 그림이 대상으로부터 독립된 색과 형에 의한 하나의 조형질서임을 확인시킨 점에서는 고갱과 나비파의 회화관에 연결되어 있다. 순수한 색채의 고양(高揚)에 기초를 둔 야수파운동은 결국 외계질서를 그대로 화면에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화폭을 자기 해방의 장소로 생각한 점 및 색과 형의 자율적인 세계를 창조하려 한 점 등에서 20세기 최초의 예술적 혁명이었다. 명확한 이론이나 목표를 갖지 않으면서도 포괄적이고 오히려 개성적인 자아표출에 공통점을 가지는 야수파운동은 1905년부터 1907년에 이루어졌고 1908년경부터 이들은 각자의 방향을 독자적으로 전개시켜 나갔다.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야수파 [fauvisme, 野獸派]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23946&cid=40942&categoryId=33048

  

 

 

<야수파>

 

야수파(野獸派) 또는 포비즘(fauvism)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 예술에서 잠시 나타났던 미술 사조이다. , 20세기 미술은 반자연주의를 기조로 하는 혁신적 유파(流派)와 사조가 어지럽게 뒤바뀌게 되지만 그 발단이 되는 것은 야수파의 운동이다.

 

강렬한 표현과 색을 선호했다. 야수파의 흐름 자체는 1900년 경에 시작되어 1910년 이후까지 지속되기는 했으나, 실제 야수파 운동은 1905년부터 1907년까지 약 3년 동안 세 차례의 전시회를 갖는 데 그쳤으며 결속력도 약했다. 이 운동의 기수로는 앙리 마티스와 앙드레 드레인이 있었다.

 

기법상의 특징은 강한 붓질과 과감한 원색 처리, 그리고 대상에 대한 고도의 간략화와 추상화이다. 눈에 보이는 색채가 아닌 마음에 느껴지는 색채를 밝고 거침없이 표현했다. 이지적인 큐비즘과는 달리 감정을 중시한다. 표현주의의 한 형태로도 볼 수 있다.

 

 

개요

 

주요한 화가로서 파리 미술학교의 귀스타브 모로 문하생인 마티스, 마르케, 카므왕, 망갱을 중심으로 하여 여기에 레옹 봉나의 아틀리에에서의 뒤피, 프리에스, 브라크 등이, 또 개인적인 교우를 통하여 블라맹크, 드랭, 반 동겐이 참가하고 있었다. 마티스를 리더로 한 이들 화가는 거의 1870년대 태생이라는 같은 세대의 연대감에 서서 이론적인 기반에서보다 기성 회화에 대하여 어떻게 하든 일격을 가하려고 하는 젊은 패기와 야심에서 공통되고 있었다. 그들이 당면한 적으로 삼은 것은 시각의 진실을 추구한 나머지 창조의 주체성과 내면적인 감동을 잃어버린 인상주의(印象主義)였으며, 따라서 이 인상주의에 중요한 수정을 시도한 선배 고흐의 격정과 고갱의 원시적 생명력의 표현은 그들을 한결같이 분발하게 하는 모범이 되었다.

 

파괴와 혁신에 불타는 포브들의 유일한 무기는 색채이었다. 그것도 빛깔의 인상을 조금씩 칠해 가는 타율적인 색채가 아니고, 단숨으로 캔버스에 범람시킨 강렬한 원색, 이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다이너마이트의 뇌관(雷管)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강렬한 원색이 작렬(炸裂)하는 가운데 감성의 해방과 자아의 고양(高揚),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고 창조적인 에너지의 대담한 연소를 다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젊은 생명력의 연소와 그것이 기성 회화에 끼친 적잖은 충격에 그들의 야수 중에도 야수다운 영역이 있으며, 거기에 포비슴이 수행한 역사적인 역할의 거의 전부가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에 가서 그러한 패기에 앞서서 확고한 이론을 갖지 못하고 다만 같은 세대라고 하는 친밀감을 바탕으로 나오게 된 포비슴의 운동은 흩어지는 것도 또한 빨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1908년에는 이미 클럽으로서의 결속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마티스는 독특한 장식체계의 확립으로, 마르케는 중후한 풍경화로, 드랭은 고전으로, 그리고 브라크는 세잔에게서 본을 딴 엄밀한 화면 구성으로, 각자가 자기 본래의 자질을 지향하여 떨어져 나갔다. 관점을 바꾸어 말한다면 밖으로 향하였던 혁신의 기개에 불탄 젊은이들이 안에서 각자의 개성의 차이를 발견해 내는 기회와 장소로 삼은 것이 클럽으로서의 포비슴의 의미였다고도 할 수 있다. 포비슴은 에콜(流派)이 아니라고 하는 의견도 이 때문에 나오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고하는 화려한 '색의 계절풍(季節風)'이었다.

 

이처럼 야수파는 9년이라는 짧은시간동안의 미술활동이었지만 20세기 현대미술의 신호탄과같은 주요사조로써 평가된다. 그 이유는 야수주의를 시작으로 화가의 주관이 색채로 표출되는, 즉 관념적 사상이 색채로써 표출될수있는 색채의 추상성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이처럼 야수파의 화가들은 하늘과바다는푸른색, 나무가 울창한 산은 초록색이라는 색채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감정을 표현하는 매개체로써 개성 강한 색채를 사용하기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아프리카와 같은 3세계미술의 성향인 원시주의(Primitivism)에 영향을 받아 더욱 과감하고 강렬하게 색채를 왜곡해나갔다.여기에 더해진 생략된묘사와 허술한표현 그리고 성의없어보이는 붓질의 흔적이 더해진 야수파의 작품은 당시비평가들에게추한그림그리고미치광이의반란이라는혹평을받았다. 그들은 야수파의 작품들을 야수적이라고비꼬았으며, '야수파'의 미술적 사조에 가담된 화가들을야수들이라조롱하는가운데 '야수파'라는 새로운 사조가 탄생하게되었다.

 

참고: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5%BC%EC%88%98%ED%8C%8C

 

 

 

 

<야수파>

 

대표 작가로 앙리 마티스가 유명. 마티스는 고흐의 영향을 받아 표현적인 선과 색채를 사용하였다.

 

마티스를 비롯한 일련의 예술가들이 야수파라고 불린 이유는, 색채를 야수처럼 파워풀하게 쓴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 당연히 처음에는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본래 사물이 가지고 있는 자연색을 무시하고, 작가가 느낀 주관적 감정에 따라 색을 마음대로 쓴 것이기 때문. 이것이 모더니즘의 정신인 반항과 일맥상통한다. 작가가 색을 선택한다는 생각을 바로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 마티스는 혹자가 여자를 못그렸다고 말하자, "나는 여성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린 것이다." 라고 말했다. 말 그대로 실제 세계의 사물을 그대로 옮겨 그리려 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림으로 그린 것임을 밝힌 것.

 

또한 마티스의 그림은 낭만주의와 마찬가지로 이국풍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블루 누드>라고 흔히 불리는 위의 작품에서 마티스는 제목에 부제로 북아프리카 도시 비스크라의 이름을 붙였다. 말 그대로 비스크라의 이국 여인을 그린 것. 이는 하렘을 그리던 낭만주의의 오리엔탈리즘과 유사하다. 하지만 몇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는데, 일단 여성이 안 아름답다. 비현실적으로 엉덩이를 지나치게 강조해 그린 것을 보자. 그리고 일부러 푸른 윤곽선으로 그려 역시 실제 대상보다는 그냥 회화적 표현에 집중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고갱과 유사성을 지적받기도 하는데, 고갱은 이슬람권이 아니라 타히티같은 오세아니아 문화에 심취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색채의 마술사라는 별명처럼, 마티스는 색면을 배치하고 사용하는데 뛰어났다. 위의 <> 같은 경우 세로 260 x 가로 391 cm의 커다란 크기의 그림인데, 마티스는 그런 큰 그림에다 저런 씨뻘겋고 시퍼런 원색적인 색을 사용했다. 이를 이용해, 실제로 그림을 보면 색면에 시각적으로 압도되도록 만들었다.

 

야수파는 감정에 따라 색을 자의적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몇년 후에 나올 표현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나무위키

https://namu.wiki/w/%EC%95%BC%EC%88%98%ED%8C%8C

 

 

 

 

<야수파(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정의

 

20세기 초 유럽에 나타난 중요한 전위적 경향의 하나로 강렬한 원색과 거친 형태를 특징으로 하는 작품을 제작한 미술가들의 양식을 가리키는 용어.

 

 

연원 및 변천

 

엄밀한 의미에서 1905년부터 1907년까지 단명했던 프랑스의 미술운동으로 쇠라(Georges Seurat)와 폴 시냑(Paul Signac) 등의 신인상주의,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폴 고갱(Paul Gauguin), 폴 세잔(Paul Cézanne) 등의 후기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주도적 인물로는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앙드레 드랭(André Derain),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공적인 단체나 조직을 구성하지 않았고 선언서나 통일된 미학도 갖기 않았다. 대체로 마티스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비공식적 모임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양식의 의미에서는 1900년경부터 1910년 이후까지 대체로 거친 붓질, 강렬한 색채, 다소 단순하고 추상적인 형태를 보이는 작품을 가리킨다.

  

 

내용

 

한국 미술계에서는 표현적인 경향 일체를 야수파 또는 야수파적 경향으로 부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야수파 도는 야수파적 경향이라는 개념은 표현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일찍이 정규는 한국에서 야수파 회화가하나의 시대사조로서가 아니라 구본웅이라고 하는 또 그 밖의 몇 화가의 개성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하며 그 이유에 대해당시 우리나라에는 현대의 서양화적인 기법이 전래되기는 하였지만 그가 살던 우리나라의 시대는 현대에 이르지않았던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대표적인 야수파 미술가는 구본웅(具本雄)이 꼽힌다. 그는 일본 야수파의 중심적 그룹이었던 이과전(二科展)에 작품을 출품하며 대담한 색채대비, 평면적 색채구성, 형태의 왜곡과 같은 야수파의 특징을 경험했다. 그의 작품 「친구의 초상」(1935)은 블라맹크의 「파이프를 문 남자」(1900-1901)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이며 「여인」(1930) 역시 마티스나 독일 표현주의 회화에 보이는 강렬한 원색과 거친 붓질을 보여준다. 인상주의 화풍을 구사하던 김주경(金周經)의 작품, 특히 「가을볕」(1937)에서도 야수파에 가까운 주관적인 원색의 색채가 사용되고 면과 선이 자유롭게 구사되고 있어 마티스의 1905년 풍경화가 연상된다. 그는만물은 일광을 받음으로써 노래하고 춤을 춘다. 가을 햇빛이야말로 신비의 힘을 어지럽게 뿌리는 노래와 춤의 결연한 융합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풍경화에서 목가적인 아르카디아의 이상을 꿈꾼 마티스와 유사한 주제의식을 드러냈다.

 

 

의의와 평가

 

표현적인 색채, 즉흥적인 붓질, 장식적인 경향 등과 같은 야수파 양식의 특징은 독일 표현주의를 비롯해 20세기 중엽의 추상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국 미술계의 경우 야수파는 일부 작가들에 의해 시도되긴 했지만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수준에 그쳤고 서양의 경우처럼 아카데미즘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야수파 [野獸派]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460039&cid=46660&categoryId=46660

 

 

  

<앙리 마티스>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프랑스의 화가. 그가 주도한 야수파(포비슴) 운동은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이며, 원색의 대담한 병렬(竝列)을 강조하여 강렬한 개성적 표현을 기도하였다. 보색관계를 교묘히 살린 청결한 색면효과 속에 색의 순도를 높여 확고한 마티스 예술을 구축함으로써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회화의 위대한 지침이 되었다.

  

출생-사망 : 1869.12.31 ~ 1954.11.3 

국적 : 프랑스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프랑스의 카토 

주요작품 : 《목련꽃을 든 오달리스크》《독서하는 여인》

 

()프랑스의 카토 출생. 처음에는 파리에서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로 전향하였다. 1892년 파리의 장식 미술학교에 적을 두고, 미술학교 수험준비를 하면서 아카데미쥘리앙에서 부그로의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그 아카데믹한 가르침에 만족할 수 없어 루브르미술관에서 모사(模寫) 등을 하고 있는 사이 G.모로의 눈에 띄어 그의 미술학교 교실로 입학하였다. 여기서 루오 마르케 등과 교우, 모로의 자유로운 지도 아래 색채화가로서의 천부적 재질이 차차 두각을 나타내었다. 1897년 소시에테 나시오날 전람회에 출품한 《독서하는 여인》을 국가가 매입하게 되자 이 전람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 후 피사로 등과 알게 되어 인상파에 접근하였고, 또 보나르나 뷔야르 등의 영향도 받았다. 모로가 죽은 후에는 아카데미 카리에르에 다니며, 드랭과 알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웠다.

 

한편 예술적으로는 드랭을 통하여 블라맹크를 알게 되고, 1900년 이후에는 세잔풍()을 도입하여 극도로 구성적인 포름과 어두운 색조로 전향하였으나, 1904년 시냐크 ·크로스와 함께 생트로페에 체재하게 됨으로써 신인상파풍을 짙게 받아들였다. 이 새로운 교우관계가 이듬해에 시작된 야수파(포비슴) 운동의 강렬한 색채의 폭발로 나타나게 되었다. 드랭 ·블라맹크 등과 함께 시작한 이 운동은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이며, 원색의 대담한 병렬(竝列)을 강조하여 강렬한 개성적 표현을 기도하였다.

 

1908년경에는 강한 색채효과를 억제하는 한편, 새로이 전개된 피카소를 중심으로 한 입체주의(큐비즘)의 방향으로 눈을 돌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1910년의 뮌헨근동미술전의 인상, 1911∼1913년 두 번에 걸친 모로코 여행으로 왕년의 포브 시대와 다른 장식적인 현란한 색채를 사용하여 특히 아라베스크나 꽃무늬를 배경으로 한 평면적인 구성이나 순수색의 병치(竝置)로 독특한 작풍을 창조하였다. 이 무렵의 작품으로는 《목련꽃을 든 오달리스크》가 있다.

 

그 후 그의 예술은 차차 성숙해져 보색관계를 교묘히 살린 청결한 색면효과 속에 색의 순도를 높여 1923년경부터 1930년대에 걸쳐 확고한 마티스 예술을 구축함으로써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회화의 위대한 지침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인 1949년 남()프랑스 니스의 방스성당의 건축 ·장식 일체를 맡아 여기에 모든 기법과 재료를 동원, 그의 예술의 집대성을 이룩하고 니스에서 죽었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세계 각국에 존재하고, 20세기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된다.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91141&mobile&cid=40942&categoryId=34396

 

 

 

<알베르 마르케[ Albert Marquet]>

 

프랑스의 화가. 초기 작품은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 대담한 묘사로 야수주의의 성향을 보였으나 점차 색채의 조화를 중시하는 온화한 화풍으로 변모했다. 색과 빛에 대한 뛰어난 감각을 지녔으며 강과 바다, 항구와 범선이 있는 풍경은 그의 작품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출생-사망 : 1875.3.27 ~ 1947.6.14 

본명 : 피에르-알베르 마르케(Pierre-Albert Marquet) 

국적 : 프랑스 

활동분야 : 회화 

출생지 : 프랑스 보르도 

주요작품 : 《생트로페 항구 The Port of Saint-Tropez(1905), 《트루빌의 광고 포스터 Posters at Trouville(1906), 《비오는 날, 파리의 노트르담 Rainy Day, Notre Dame de Paris(1910), 《금발 여인 La femme blonde(1919), 《밤의 퐁네프 Le Pont Neuf la Nuit(1935)

  

알베르 마르케(Albert Marquet) 1875년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최고의 와인 산지 보르도에서 태어났다. 열다섯 살 되던 1890년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주하여 파리 국립장식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를 만났고, 이들의 우정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1892년 마르케는 다시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해 상징주의 화가 구스타프 모로(Gustave Moreau)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모로의 아틀리에에서 마티스,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등과 공동수업을 하며, 후에야수파로 불리어지는 젊은 화가들과 교류했다.

마르케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그랑 팔레의 장식 일을 하기도 했고, 앙데팡당전에 꾸준히 작품을 전시하며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1905년 마르케는 살롱 도톤(프랑스 파리에서 해마다 가을에 개최되는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했다. 마티스, 앙드레 드랭(André Derain),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 앙리 망갱(Henri Manguin) 등이 참여한 이 전시회는 대담한 색채와 격렬한 붓질로 전통적인 회화 개념을 부정하고 화가의 주관과 본능을 강조하여야수파의 발단이 되었다. 마르케 역시 선명하고 강렬한 색상과 대담한 묘사를 특징으로 한 야수파의 대표 화가로 지목되었다.

마르케는 작품 활동의 초기에 야수파 화가들과 어울리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야수주의의 성향이 드러났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회화의 원칙은 색채의 조화로움이었다. 그는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 외젠 부댕(Eugène Louis Boudin),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기법들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하면서 자연스럽고 평온한 색채와 형태를 추구하게 되었다.

마르케는 1904년부터 1906년까지 라울 뒤피(Raoul Dufy)와 함께 노르망디와 지중해 연안의 부두와 항구 도시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르아브르, 트루빌, 옹플뢰르 등을 여행하며 그린 그림은 부드러운 색감에 서정적인 풍경이 두드러졌다. 1908년에는 파리의 생 미셸 부둣가에 위치한 마티스의 작업실을 양도받고 그곳에서 수많은 풍경화를 그렸다. 그러면서 점차 야수파의 경향에서 벗어나 색채의 조화를 중시하는 부드럽고 온화한 화풍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마르케는 프랑스의 여러 도시들과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북아프리카, 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 등을 여행했다. 1940년부터 1945년에는 알제리에서 살았다. 수많은 도시와 새로운 풍경을 접하면서 색과 빛에 대한 감각은 더욱 예민해졌다. 특히 수면에 반사된 빛을 묘사하는 데에 탁월했다. 강과 바다, 항구와 범선이 있는 풍경은 그의 작품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으며, 이러한 그의 회화적 경향은 인상주의의 전통을 잇고 있다. 마르케는 평생 동안 풍경화를 즐겨 그렸지만, 누드와 초상화도 남겼다. 1909년부터 1913년 사이에 그려진 그의 누드화들은 야수파의 적나라한 사실주의 기법과 과장된 표현을 엿볼 수 있다.

마르케는 1945년에 파리로 돌아와 1947 614일 담낭암으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주요 작품에는 《망통 해변 Harbour at Menton(1905), 《생트로페 항구 The Port of Saint-Tropez(1905), 《트루빌의 광고 포스터 Posters at Trouville(1906), 《나폴리 항구 The Bay of Naples(1909), 《비오는 날, 파리의 노트르담 Rainy Day, Notre Dame de Paris(1910), 《파리 트리니티 광장 Place de la Trinity in Paris(1911), 《마르세유 항구 The Port of Marseilles(1916), 《금발 여인 La Femme Blonde(1919), 《밤의 퐁네프 Le Pont Neuf la Nuit(1935) 등이 있다.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알베르 마르케 [Albert Marquet]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90389&ref=y&cid=40942&categoryId=34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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