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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갤러리

김계신 작가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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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신 작가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자연의 섭리에 대한 종교적 관조>

 

김계신에게 있어서 작업은 창조주에 대한 절대 사랑이 전제된다.

 

그에게 있어서 나뭇가지나 나뭇잎,열매 하나하나가 하나의 섭리로 받아들인다.

 

말하자면 지식과 이성의 영역을 초월한 상태, 절대자의 의지와 만나는 일이다.

 

일상적이고 세상사적인 안목에 비추어 바라본다면 해결 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그는 나무 한그루, 과일 한 송이를 어떻게 하면 잘 그릴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 앞서 그 피조물이 원칙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명에 주목해왔다.

 

그 대상과 마주함에 있어서 작가자신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관계를 흠모하는 일, 이것이 곧 자기 고백이요, 영적 리얼리티와 연계하는 일이다.

 

그러기에 김계신에게 있어서 꽃과 나무는 정물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영적 대상과 자신을 일치 시키는 상징물이 된다.

 

그의 유채작업은 기름기 없는 담박한 표현이 인상적이다.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화면을 구성해 간다.

 

때로는 대지에서 느껴지는 마티에르가 화면 전반에 느껴진다.

 

담박함이나 평범함이 오히려 드물어진 오늘 날의 예술현상 속에서 질박한 뉘앙스를 선사하는 것이 그의 작업이다.

 

이번 개인전은 최근 수년간의 작업에 대한 결실이다.

 

그의 작업을 통하여 많은 감상자들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고 감사의 언사가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김계신의 작업은 이러한 소망을 담는 그릇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의 작업은 그 소망에 대해 얼마나 헌신하고 흠모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답안이다.

 

김계신은 우리 모두가 작은 자연물을 통해서도 영적인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거기로부터 맑은 영혼을 우리가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의 작품을 통해 창조주의 실재함을 경험하는 놀라운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면 더더욱 좋을 일이다.

 

- 김윤조(예술의전당 큐레이터) 평론 중에서

 

 

 

김계신 작가님개인전을 7회 하셨어요~~~~^^

 

개인전을 한 곳은

 

2019 인사이트센터

 

2018 자미갤러리 초대전

 

2017 아산병원갤러리 초대전

 

2016 KBS시청자갤러리 초대전

 

2015 인사아트센터

 

1994 정갤러리

 

1991 인데코화랑

 

에서 전시를 하셨어요~~~~^^

 

 

 

김계신 작가님그룹전

 

2018 'Oh! Henry 전'(자미갤러리 4인 초대전)

 

2017 여수국제아트페스티벌 선정작가전(여수)

 

2017 아름다운 동행전(밀알미술관)

 

2016~2017 KCAF그리스찬아트피스트(원주미술관, 선바위미술관)

 

2016 시와 미술(수원미술관)

 

2013~2015 BARA 전(인사아트센터)

 

2013~2015 Lawa전(2014 사랑갤러리)

 

2009~2012 TWIN CROSS전(인사아트센터, 라메르, 단성갤러리)

 

2010~2018 모란꽃 사생작가 초대전(다누리미술관)

 

2008~2018 목우회 회원전(예술의전당, 시립미술관 등)

 

2010 장미와 포한만의 사계전(포스코아트뮤지엄)

 

2010~2018 목우회 여성회원전(한전아트센터)

 

2011 아름다운독도(포상학생회관)

 

2008 전북미술대전 수상작가전(한국소리문화의전당)

 

2006 크리스천아트페스티벌(성남아트센터)

 

2006 현대회화의 만남전(안산예술의전당)

 

2005~2013 강동미협(한강의 흐름, 생명, 봄의 향기전)

 

2010 한일교류전(일본무사시노)

 

1999 밀리니엄기수전(동아갤러리)

 

1998~2009 국제에술위원회 회원전(서울갤러리, 파리르싸롱, SNBA, 청도, 호주, 일본전)

 

1992~1996 이형회 회원전(서울프레스센터)

 

1992~1996 이형회 초대전(롯데갤러리, 전주, 대구봉성갤러리)

 

1989~2010 전북미술대전 추천작가(89~90)

 

1989~2010 초대작가(91~2010)

 

1982~1994 전미회 회원전(82.94)

 

1982~1994  전북예술회관개관초대전(82)

 

1982~1994  한중미술교류전(83~85)

 

1982~1994 원광대교수작품전(84,85)

 

1982~1994 KBS 전주 초대전(85)

 

1982~1994 시도미술대전 수상작품전(문예진흥원 85, 86, 88)

 

1982~1994 노령전(89~)

 

1982~1994 수채신작파전(88)

 

1982~1994 전북대학교 초대전(92)

 

1982~1994  MBC 중진작가 초대전(97)

 

에서 전시를 하셨어요~~~^^

 

 

 

김계신 작가님 수상경력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2002, 2003), 입선(80국전, 84, 85, 2010)

 

전북미술대전 최우수상(85, 86, 88), 동상(80), 특선(84)

 

을 하셨어요~~~~^^

 

 

 

 

김계신 작가님경력

 

원광대 미대, 국립군산대 강사 역임, 목우회 심사, 한국현대여성미술대전, 현대조형미술대전, 평화미술대전, 전북미술대전 심사 역임,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의 

 

경력을 가지고 계셨어요~~~~^^

 

 

 

김계신 작가님은 현재

 

(사)목우회, (사)한국미협, 강동미협, BARA회원, 한국현대여성미술대전, 현대조형미술대전 운영위원

 

이셨어요~~~~^^

 

 

 

김계신 작가님 작품소장

 

정부미술은행(과천 현대미술관), 제주로뎀하우스

 

에서 소장하고 있었어요~~~~^^ 

 

 

 

 

아래부터는 김계신 작가님 작품들이에요~~~~^^

 

감람나무 | Mixed Media | 130.3 x 89.4cm

 

 

 

 

 

모란 | Oil on canvas | 72.7 x 50cm

 

 

 

 

 

유채밭 | Oil on canvas | 72.7 x 60.6cm

 

 

 

 

 

옛도시 | Mixed Media | 53 x 40.9cm

 

 

 

 

 

인사동 | Oil on canvas | 53 x 40.9cm

 

 

 

 

 

프로방스 카페 | Mixed Media |  40.9 x 31.8cm

 

 

 

 

 

결실(올리브 열매) | Oil on canvas  |  40.9 x 31.8cm

 

 

 

 

 

결실 | Oil on canvas | 162.2 x 112.1cm

 

 

 

 

 

매밀꽃 들녘 | Oil on canvas | 162.2 x 130.3cm

 

 

 

 

감람나무 | Oil on canvas | 162.2 x 130.3cm

 

 

 

 

 

5월의 감람나무 | Oil on canvas | 162.2 x 130.3cm

 

 

 

 

 

감람나무 | Oil on canvas | 145.5 x 97cm

 

 

 

 

 

감람나무 | Oil on canvas | 116.2 x 91cm

 

 

 

 

 

우도 | Oil on canvas | 116.8 x 80.3cm

 

 

 

<내가 본 전시회 느낌>

 

김계신 작가님 작품들의 주제는 자연을 소재로 작가님의 감성을 통해서 그리셨어요.

 

김계신 작가님의 자연주의적 기법은 프랑수아 밀레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김계신 작가님의 작품을 보게 되어서 행운이였고 다음 전시회가 또 기대가 되네요.

 

 

 

 

이 작품 사진들은 작가의 촬영 허락으로 제작 하였습니다. 

 
이 작품 사진들 안의 그림들은 작가의 허락 없이 무단 사용을 할 수 없습니다


 

 

 

아래는 인사아트갤러리 위치에요~~~~^^

 

 

 

 

아래는 김계신 작가님과 같은 자연주의를 찾아보았어요~~~~^^

 

 

 

 

자연주의[ naturalism , 自然主義 ]

 

자연을 유일의 현실로 간주하는 입장. 원래는 철학 용어이지만 1870년 이후 문학, 미술 등 예술 분야를 지배한 사조를 가리킨다. 사실주의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묘사, 제시하고자 하였다면 자연주의는 대상을 자연과학자 또는 박물학자의 눈으로 분석, 관찰, 검토, 보고하는 것이다. 이 용어는 모든 자연 현상은 과학적으로 논증될 수 있다는 철학의 한 분파를 설명해 주며 또한 개인의 운명은 자유 의지가 아니라 유전과 환경에 의해 주로 결정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인물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발전시켰던 문학의 학파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 결과 자연주의 작가들은 인물이 어느 정도 야만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설정하면서 개인을 내적 혹은 외적 힘의 희생자로 그린다.

 

자연주의는 야비한 일상적 현실을 묘사한 극단적 사실주의의 한 형식이다. 프랑스 소설가 에밀 졸라(Emile Zola)가 이러한 학파의 중요 인물이었고 졸라를 추종한 사람들로는 영국의 소설가 에드워드 무어(Edward Moore), 조지 기싱(George Gissing), 미국 작가 프랭크 노리스(Frank Norris)와 시어도어 드라이저(Theodore Dreiser)가 있다.

 

문학의 이러한 유형은 영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은 프랭크 노리스의 『맥티그』(McTeague, 1899)를 영화화해서 〈탐욕〉(Greed, 1924)을 만들었다. 〈탐욕〉은 사실주의적인 인물, 이야기, 장식을 내세운 영화사의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많은 갱스터 영화들과 필름 누아르 작품들 또한 비열한 세계의 인간 본성에 대한 시각을 드러내기 때문에 자연주의 영화로 평가받는다. 프리츠 랑(Fritz Lang)의 〈빅 히트〉(The Big Heat, 1953)와 사무엘 풀러(Samuel Fuller)의 〈남쪽 거리에서 태우기〉(Pickup on South Street, 1953)가 그러한 작품들이다. 루이스 부뉴엘(Luis Bunuel)의 〈버려진 아이들〉(The Young and the Damned, 1950)은 멕시코 어린이들이 처해 있는 불건전한 환경의 유해한 영향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자연주의적이다.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자연주의 [naturalism, 自然主義] (영화사전, 2004. 9. 30., propaganda)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49995&cid=42617&categoryId=42617

 

  

자연주의[ 自然主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정의

 

초월적·신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정신현상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현상과 그 변화의 근본원리가 자연(물질)에 있다고 보는 철학적 체계.

 

내용

 

이러한 실재론을 바탕으로 이상주의에 반대하고 실증주의와 결정론(determinisme)을 중시하며, 특히 당대 사회의 객관적 묘사와 과학적 방법(관찰과 실험)을 도입·강조하는, 19세기 후반(1860-1880)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생한 문학사조.

 

자연주의는 naturalism(naturalisme)의 역어이다. 사실주의(realism)와 혼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주의를 계승·강화하면서 당대 사회의 자료 수집과 객관적 묘사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나, 콩트(Comte, A.)의 실증주의를 문학에 도입한 테느(Taine, H.)의 과학적 법칙, 결정론(決定論), 그리고 과학적 실험과 관찰을 특히 강조한 점에서 사실주의와 일단 식별된다.

 

고대 철학에서는 유물주의, 쾌락주의, 또는 여러 가지 세속주의를 의미했던자연주의의 개념은, 쾌락주의적 무신론자들의 교리(16세기 암브롸르 파레), () 대신에 유물적 실체를 신봉하는 사상(디드로), 유심론의 반대 개념(1882년 카로), 유심론 내지 범신론 및 자연주의와의 동일시(1839년 생트 뵈브) 등으로 변천되어 왔다.

 

또는1원리로서 일체를 자연에 돌리는 철학체계”(에밀 리트레의 『프랑스어사전』, 1877), “예술은 오로지 자연의 재현이 아니면 안된다.”(다르메스테르의 『프랑스어 일반사전』, 1889) 등의 사전적 정의로도 정착된다.

 

자연주의는 예술에서 그 개념이 결정적으로 일반화된다. 먼저 미술계에서, 그 다음에 문학 용어로 정착된다. “자연의 정확한 모방을 주장하는 사고방식”(17세기 미술 아카데미 회합에서 사용), “자연주의파의 가장 빛나는 대표자”(어느 화가의 데생을 평한 보들레르의 말) 등이 처음 사용된 예이다.

 

그리고그 승리가 영원히 보증된다고 한다면, 자연주의가 관찰이라는 과학적 방법에 합치하고 인간정신의 일반적 경향과 조화하기 때문이다”(J.A.카스타냐리, 1867년의 미술전평) 등으로 사용되다가, 졸라(Zola, E.)에 의하여 소설 『테레즈 라캥(Therese Raquin)(1867) 2판 서문에 사용되어, 이후 졸라 중심의 사조로 인식되고, 졸라이슴(zola○sme)이라는 개념도 사용된다.

 

자연주의는 고립 사조가 아니라 시대적 생성 배경, 즉 테느의 과학이론, 베르나르의 실험의학이론, 그리고 당대의 철학적·정치적·사회적 환경의 산물이다. 18세기 전통의 상속자인 이데올로그(1820)의 이성신앙, 낭만주의가 종언의 막을 내린 1830(7월 혁명)에 우세해진 예술의 사회적 공리론(철학파), 이어 콩트의 『실증철학 강의』(1930∼1942)가 등장하면서 모든 면에서 이성의 현대적 형태인 과학, 실증정신(positivisme) 등이 보편화한다.

 

발자크(Balzac, H.)와 그의 유파인, 1850∼1860년에 걸친 플로베르(Flaubert, G.)와 샹플뢰리(Champfleury)의 사실주의, 실증철학을 문학에 도입하여 종족(race)·환경(milieu)·시대(moment)라는 외적 조건을 문학 생성의 원인으로 제시한 테느(Hippolyte Taine)의 『영문학사』(1856∼1864), 의학이 생리학의 기초이며, 계획적 실험(experimentation)을 강조한 베르나르(Bernard, C.)의 『실험의학연구서설』(1865) 등이 배경이 된다.

 

그리고 당시의 다윈(Darwin, C.)주의와 브륀티에르(Brunetiere, F.)의 장르 진화론 등의 과학사상의 유행, 졸라의 이론과 1870년 이후의 제3공화국과의 연결 등이 모두 자연주의 생성 및 발전의 배경이 된다.

 

자연주의의 중심은 졸라이다. 여기에 모파상(Maupassant, G.), 공쿠르 형제(Edmond et Jules de Goncourt), 도데(Daudet, A.), 극작가 앙리 베크(Becque, H.), 그리고 졸라의 문하에 모여 엮은 문집 『메당의 저녁』(1880) 멤버 5(레옹 엔니크·앙리·세사르·유이스망스·폴 알렉시스·에두아르 로드) 등이 참가한다.

 

이미 스탕달(Stendhal)·발자크·플로베르·공쿠르 형제 등 선행 리얼리즘을 읽은 졸라는, 『테레즈 라캥』 등을 쓴 이후, 비로소 전 20권의 『루공 마카르(Rougon-Macguart)(2제정하의 한 가족의 자연적·사회적 역사 약칭 : 루공 마카르 총서, 1871∼1893)를 계획한다. 이 소설의 변호를 위한 저작을 합치면 30권이나 되며, 그 외의 그의 저작은 겨우 10권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테느의 사상과 베르나르의 『실험의학연구서설』의 영향을 받고 『실험소설론』(1880)을 발표할 때에는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중 이미 9권이 발표되었으나 그 이전에 실험소설론에 관한 장기간 논쟁이 있었음에 비추어 실험소설론이 밑받침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발자크의 『인간희극』(17, 1842-1848)이 왕정복고 시대와 7월혁명 시대를 묘사했듯이, 2제정시대(1852-1870)의 전반적 사회상의 묘사를 시도한 이 총서는 발자크 시대보다 더욱 발달한 생물학과 생리학, 유전의 법칙, 실험과학 등이 반영되었다. 물론, 방대한 자료수집, 기록, 객관묘사, 노동자 세계와의 관련(「목로주점」, 1877), 사회비판과 사회주의 시사 등을 내포한다.

 

모파상의 단편에서는 자연주의에서 일탈된 작품이 있고, 공쿠르 형제는 1860년 이전에 이미 자연주의 작품을 발표했으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양쪽에 다 포함되기도 한다. 졸라의 문하에 모여 집단적 자연주의 운동을 전개한 『메당의 저녁』(1880) 그룹과 졸라의 『실험 소설론』(1880)이 발표된 이후, 자연주의는 약 10년간을 주도한다. 그리고 그 영향은 앙리 베크(『까마귀떼』, 1882)를 거쳐 앙토와느(Aotoine, A.)의 자유극장(1876∼1896)의 연극에까지 미친다.

 

한편 국경을 넘어, 독일의 게르하르트(Gerhardt, H.), 헤르만 주더만(Sudermann, H.), 아르노 홀츠(Holz, A.), 요하네스 쉴라프(Schlaf, J.), 영국의 토머스 하디(Hardy, T.), 조지 무어(Moore, G.E.), 북유럽의 입센(Ibsen, H.), 스트린드베리(Strindberg, J.A.), 미국의 드라이저(Dreiser, T.H.A.), 존 스타인벡(Steinbeck, J.E.)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자연주의 부정적인 요인은 자연주의 안팎에 깃들어 있었다. 안으로는 모파상의 이탈 징조(『여자의 일생』, 1883)와 반대 표명(『피에르와 장』(1888)의 서문)을 우선 보게 되고, 도데의 작품이 자연주의임이 분명하나 과학적 공식과 메당그룹의 극단적 경향을 제거하고 나면 남는 근대적 경향이 도데의 소설에 해당한다는 견해도 제기된다.

 

밖으로는 유심적·보수적·카톨릭적 당파 및 인상비평, 아나톨 프랑스의 졸라에 대한 공격(무지와 둔중, 예술에의 무관심), 특히 졸라의 제자들에 의한 스카톨로지(분뇨문학)라는 공격 그리고 시대의 변화(상징주의 문학의 발생) 등이 그 것이다. 또 『금전』(1891)에서 자본 집중이 사회주의에 길을 열어 줄 것이라는 졸라의 암시, 노동자 계급의 새로운 영역 개척, 현실참여 등의 긍정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오히려 발자크 편을 든다.

 

한국 근대사의 후진 속에서 1910년대부터 일본을 매개로 자연주의가 도입된다. 일본의 경우, 쓰보우치 쇼요(坪內逍遙)의 『소설신수(小說神髓)(1885), 후타바데이 시메이(二葉亭四迷)의 『소설총론』(1886) 등이 리얼리즘 도입의 선구적 저서이고, 졸라의 자연주의는 모리 오가이(森鷗外)의 「소설론(小說論)(讀賣新聞, 1889)에 의해 처음 소개된다.

 

이어서 고수기 텐가이(小杉天外)의 소설 「뱀딸기(蛇いちご)(1899)·「첫 모습」 등이 1900년 전후에 발표되며, 이밖에 가네코 지키수이(金子筑水)의 「自然主義論」(1907), 시마무라 호게쓰(島村抱月)의 「문예상(文藝上)의 자연주의(自然主義)(1908) 등이 있다. 한국의 경우 자연주의는 사실주의· 낭만주의·상징주의 등과 혼류·교착 현상을 피할 수 없었다.

 

영국의 의사인 스마일스(Smiles, S.)의 『성행론(性行論)』 번역에서(『少年』, 2, 9, 1909.10.) 인체 해부학의 개조(開祖)에 대한 소개를 비롯하여, 자연주의 생성 배경에 기여할 수 있는 논문들(「구주사상(歐洲思想)의 유래」(필자 미상), 동아일보, 1922.3.10.∼6.22., 朴庸淮, 「자연과학에 대한 인생관」, 개벽 3, 1920.8., 林房雄, 「과학과 예술」, 개벽71, 1926.7., 金完熙, 「유전의 힘」, 학지광 27, 1926.5. )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계몽 수준에 머무를 뿐이고 과학문명의 도입(우두종법(1879), 전신시설(1885), 철도 개설(1900))도 과학적·유물적 사상의 사회화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리얼리즘과 관련된 용어는 1907년 무렵(白岳春史의 소설 「多情多根」, 태극학보, 1907.1, 夢夢의 소설 「요조오한」, 대한흥학보, 1909.12 )에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재래의 공상적·몽상적·낭만적 문학에 대한 반동사조로서 자연주의가 도입되는 것은 백대진(白大鎭)의 「현대 조선에 자연주의 문학을 제창함」(新文界, 1915.12)부터인 듯하다. 여기서 그는 현실의 실제 인생 또는 그 부정적인 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공리론적인 문학을 제창한다.

 

현철(玄哲)의 「소설개요」(개벽1∼2, 1920.6.∼7.)는 본격적 소설론인 바, 자연주의적(또는 사실주의적) 입장에서 인생·사회의 진상 묘사, 특히 한 시기의 국부적, 즉 하층사회의 노동자 계급 묘사를 강조한다(졸라는 「제르미날」(1885), 「大地」(1887), 「금전」(1891) 등에서 노동계층의 묘사와 사회주의를 암시한다.).

 

양백화(梁白華)는 「호적씨(胡適氏)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문학혁명」(개벽5∼6, 1920.11.12.)에서 진독수(陳獨秀)와 호적(胡適)의 문학론을 소개한다. 여기서 그는 사실문학·사회문학·하층민(노동자 계급, 소상인 등)의 고뇌 묘사, 현장 관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논문에는 과학사상·실증주의·실험소설론 등에 관한 언급은 없으나, 김억(金億)의 「근대문예」(개벽, 1921.6.∼1922.3.)에 이르러 낭만주의에 대한 안티테제(Antithese : 反定立), 현실의 추악성과 수성(獸性)의 묘사, 객관적 관찰과 실험 등을 말하면서 최초로 에밀 졸라의 실험소설론과 과학주의 즉 졸라이슴을 소개한 본격적 자연주의론이 전개된다. 사전적 해설이긴 하나 「문학부 80어」(개벽 49, 1924.7.)에는 자연주의·암면묘사(暗面描寫테느의 과학적 비평 등의 항목을 비교적 정확·상세하게 해설하고 있다.

 

1920년대에 자연주의소설이 발표되지만,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요소를 공유한다. 그런 중에서도 테느의 환경법칙과 결정론, 생물학적 인간관이 가장 현저한 작품은 김동인(金東仁)의 「감자」(조선문단, 1925.1.)와 「김연실전(金姸實傳)(문장, 1939.3.)이다. 전자는 한 여자가 빈곤·물욕·본능이라는 환경적·생물학적 법칙에 몰락하는 과정을, 후자는 생물학적 본능 속에서 타락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현진건(玄鎭健)은 「빈처(貧妻)(개벽, 1921.1.)·「술 권하는 사회」(개벽, 1921.11.)에서 주인공이 비록 지식인이지만 식민지 조선사회가 빈곤과 그로 인한 모든 불행의 원천임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운수 좋은 날」(개벽, 1924.6.) 등에 이르러 비로소 노동자 계층과 사회성이 암시된다.

 

최서해(崔曙海)의 「토혈(吐血)(동아일보, 1924.1.28.)과 「탈출기」(조선문단, 1925.3.) 등에서 이러한 자연주의 원칙들의 일단이 극단화한다. 염상섭(廉想涉)의 「만세전」(1922∼1924)에서는 사회의 지배(일본)와 피지배(조선) 구조, 불가항력적 환경(무덤과 같은 현실)이 제시되고, 「표본실의 청개구리」(개벽, 1921.8.∼10.)의 노이로제()와 광인(김창억)은 식민지적 환경법칙의 산물이지만, 청개구리의 해부장면은 졸라의 실험방법의 제시라기보다 식민지 환경이 피지배 민족을 가해하는 범죄의 상징인 듯하다.

 

한국의 자연주의는사실주의와 혼용되고 있는 점, ② 시기적 변천 과정이나 개인별 및 작품상 사조 구별의 불투명성, ③ 졸라이슴의 미숙성(특히 실험 소설론의 미숙한 수용), ④ 생물학적 인간관과 결정론에 대한 철학적 인식의 불처저성 등을 내포하고 있다. 폴 알렉시스(Alexis, P.)자연주의는 죽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자연주의라는 용어보다는 리얼리즘이 압도적으로 보편화하고 있다.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자연주의 [自然主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37858&cid=46645&categoryId=46645

 

 

 

자연주의 (미술)

 

미술에서 자연주의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실제의 사물들을 묘사하는 사조를 말한다.

 

19세기 사실주의 운동은, 낭만주의에서 주체를 일정한 양식에 일치되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묘사하는 데에 대응하여, 자연주의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많은 화가가 여러 세기에 걸쳐 유사한 접근을 해오고 있었다. 자연주의에 해당하는 예를 하나 들면, 미국의 화가인 윌리엄 블리스 베이커(William Bliss Baker)가 그린 풍경화를 들 수 있다. 자연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대목은, 삶에 대한 다윈 이론의 관점과 자연의 힘 앞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부질없는 노력이다.

 

참고: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E%90%EC%97%B0%EC%A3%BC%EC%9D%98_(%EB%AF%B8%EC%88%A0)

 

 

 

-프랑수아 밀레[ Jean-François Millet]

 

출생 - 사망 : 1814.10.4. ~ 1875.1.20.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한국의 이발소를 비롯한 지구촌 구석구석에 그 복제화가 걸려 있어 누구나 본 적이 있는 그림인 [만종]의 화가다. 일하는 농부 그림들을 많이 그려농부의 화가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밀레만큼이나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와 박수근이 이상으로 삼은 전설의 화가이기도 하다.

 

밀레가 농촌 출신이고 농부의 아들인 것은 사실이다. 그는 프랑스 서북부 노르망디 지방 그레빌(Gréviln>)에 있는 작은 농촌 마을 그뤼시(Gruchy)의 전형적인 가톨릭 가정에서 8형제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규교육은 초등학교로 그쳤지만 베르길리우스를 비롯한 고전과 당대의 문학을 평생 가까이 한 밀레는무지한 농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화가 수업은 1835년부터 그레빌에서 가까운 가장 큰 도시인 셰르부르(쉘부르, Cherbourg)에서 무셸(Bon Du Mouchel)과 랑글루아(Lucien-Théophile Langlois)를 스승으로 삼아 시작했다. 1837년에 셰르부르시의 장학금을 받고 파리에 간 밀레는 국립 미술 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의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의 화실에 들어간다. 1839년에 로마상(Prix de Rome)에 도전했다 실패한 그는 에콜 데 보자르를 떠났다.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는 초상화가로 출발

 

당시 화가가 작품을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던 전람회인 살롱(Salon)전에서도 밀레는 수차례 낙선을 했다. 그러다 1840년 살롱전에 초상화 한 점이 당선된 것에 힘입어 밀레는 초상화가로 활동했다. 초상화는 19세기에 화가, 특히 지역 화가가 돈을 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파르당(Feuardent)의 초상]과 같은 작품에서 밀레는, 그가 파리에 와서 즐겨 찾았던 루브르의 대가들을 연상시키는 남다른 초상화 솜씨를 보인다. 이 시기 그의 초상화는 렘브란트의 초상화처럼 색조는 가라앉아 있고 기법은 고전적이나, 인물의 특징과 성격이 그만의 방식으로 생생하게 포착되어 있다.

 

1840년대에 밀레는 셰르부르와 파리를 오가며 초상화뿐 아니라 로코코풍의 목가적인 회화와 누드화도 그렸으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비평적으로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1841년에 셰르부르에서 결혼한 아내 폴린-비르지니 오노(Pauline-Virginie Ono)는 빈궁한 생활을 함께하다 1844년에 결핵으로 사망한다. 그녀의 초상화에서도 모델의 내면을 보여주는 초상화가 밀레의 장기가 돋보이는 가운데, 색채는 좀 더 화사해지고 붓질이 부드러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45년에 만난 카트린 르메르(Catherine Lemaire)는 밀레의 두번째 부인이 된다. 셰르부르의 한 카페 여종업원이었던 그녀는 밀레의 가족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가 사망할 때까지 고향을 찾지 않고 그녀와 살며 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다. 밀레는 평생 여러 가지 질병과 가난에 시달렸으나 극빈의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돈에 쪼들리는 생활을 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나 돈이 전혀 없어서라기보다 부부 모두 생활을 규모 있게 꾸려가는 능력이 부족했던 탓이 더 큰 것으로 추측된다. 1849년작 [카트린 르메르 초상]의 부드러운 분위기는 밀레 회화의 새로운 단계를 예고한다. 이 시기에 그는 바르비종으로 이주한다. 바르비종은 파리 근처 퐁텐블로 숲가의 작은 마을인데 1830년대에 화가들이 대거 모여들어 자연 풍경을 그리는 바르비종 화파(Barbizon School)를 이루었다. 1848년을 전후해 그는 바르비종의 화가들을 알게 되었다. 그중 테오도르 루소는 이후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된다. 밀레는 바르비종에서 작업은 했지만 이들과 달리 풍경보다는 인물에 집중했다.

 

이 시기에 밀레는 알프레드 상시에(Alfred Sensier)도 알게 되는데 공무원이었던 그는 평생 화가의 친구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상시에는 밀레의 그림을 파는 화상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그와의 경험, 서로 주고받은 수백 통의 편지를 토대로 [-프랑수아 밀레의 삶과 작품]이라는 전기를 썼다. 이 전기는 그가 끝마치지 못하고 사망하여 폴 망츠(Paul Mantz)라는 미술사학자가 완성, 1881년에 출판했다. 이 책은 밀레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일차 자료이자 소중한 사료이지만, 반 고흐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탐독하고 밀레를 우상화하는 결과를 낳은, 과장된 신화의 원천이기도 하다. 상시에 본인도 밀레에게 도움을 많이 주긴 했지만 작품 제작에 있어서 참견을 더 많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하는 농부에게서 발견한 필생의 주제

 

바르비종으로 이주하기 직전인 1848년 살롱전에 출품한 [키질하는 사람]농부의 화가밀레 이력의 출발을 알리는 작품이다. 여기에서 그는 신화나 종교 속의 장면을 상상해서 그리지 않고, 현실에서 만나는 평범한 인간, 그중에서도일하고 있는 농부를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화면에는 곡식을 까불러서 검불을 날려보내는 일을 하는 단 한 명의 농부가 보인다. 밀레는 인물의 얼굴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았다. 배경에서도 명확히 드러나는 것이 없다. 초점은 오로지 키질이라는에 맞추어져 있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농부의 노동이 그림의 주제이다.그 노동의 이미지를 웅장한 느낌으로 보는 사람에게 각인되게 하는 것이 밀레 그림의 힘이다. 그리 크지 않은 밀레 그림의 인물이 커 보이는 것은 인물을 그린 방법, 인물과 배경의 관계 때문이다. 즉 밀레는 인물의 세부 묘사를 생략해서 커다란 덩어리가 되게 했고, 이러한 소수의 인물을 단순화한 공간의 전면에 배치하여 장엄한 느낌을 낳은 것이다.

 

1850년 살롱전에 밀레는 씨를 뿌리며 걸음을 내딛는 농민을 그린 [씨 뿌리는 사람]을 출품했다. 이 작품은 보수적인 비평가와 진보적 비평가 양쪽의 주목을 받았다. 보수적인 비평가가 보기에 거칠고 이상화되지 않은 이 거대한 농부는 불편한 존재였다. 1848 2월 혁명으로 수립된 공화정 시대의 진보적인 비평가에게 밀레의 미술은 평범한 사람이 예술의 주제가 되는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변화의 신호였다. 그러나 밀레 자신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비관적, 보수적 기질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농부 그림에서는 산업화로 인한 농촌 인구 이탈이나 그로 인해 변화하는 농촌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19세기 초의 농촌에 복고적으로 집착하여 구식 농법과 구식 농기구를 굳이 찾아서 화폭에 담았다. [씨 뿌리는 사람]의 경우처럼 구약 성서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농업의 이미지가 그런 맥락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와 같은 사상을 가졌다기보다, 그림을 통해 고금의 모든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고통스러워도 해야만 하는 노동을, 그렇게 고단한 인간 삶의 조건을 자기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보스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1855년 작품 [빨래하는 여인들]은 해질녘 빨래를 마친 여성들이 빨랫감을 정리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밀레는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을, 대낮보다는 해질녘이나 달밤 등을 더 즐겨 화폭에 담았다. 이 작품 외에도 밀레의 그림에는 하루의 시간 변화와 계절의 바뀜을 알 수 있는 작품들이 많다. 밀레 그림에는 그가 살았던 2월 혁명의 1848, 파리 코뮌의 1871년과 같은 시간은 없다. 밀레의 시간은 변화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순환하는 것 곧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기도 하다. 밀레의 그림에서 시간과 계절에 따라 해야 할 일을 하는 농부들의 삶은 조상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 그의 농부들은 늘 그들의 벗어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노동, 심고 거두는 끝없는 육체노동을 하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실 잣는 여인 ], [ 세탁하는 여인], [재봉사], [모성애] 등 농가 안팎의 다양한 노동, 특히 여성 농민의 노동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농촌 생활 구석구석에 미친 그의 세심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영원 속에 고정된 거대한 농부들

 

1857년 살롱전에 출품한 [이삭 줍는 여인들]은 밀레 특유의서사적 자연주의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림에는 세 명의 가난한 여성 농민이 힘들게 허리를 굽혀, 먼 배경의 추수하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이삭을 줍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 여성들의 자세는 얼핏 보면 자연스러운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시간이 멈춰져 굳은 듯한 운동감 없는 정지 동작임을 알 수 있다. 밀레는 농촌의 삶을 자세히 관찰하기는 했으나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작품은 스케치부터 완성까지 작업실 안에서 이루어졌고, 수많은 밑그림을 통해 그는 인물의 배치와 동작을 정교하게구성했다. 그 결과 조각 같은 육중한 정지 동작의 인물들이 탄생한 것이다.

 

밀레의 다른 농부들처럼 이 여성들의 경우에도 얼굴에 초상적인 특징은 나타나지 않는다. 여성들의 머릿수건이 파랑, 빨강, 노랑으로 맞춰진 것에서 보이듯 의상도 사실적인 사생의 결과가 아니다. 밀레는 계절에 상관없이 늘 비슷한 복장을 한 농부를 그렸다. 밀레의 농부들은 체격이나 나이 또한 거의 비슷하다. 이렇게 그는 농촌 생활의 사실성을 반영한 동시에 변형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밀레가 만들어내고자 한 것은 특정 농부가 아니라농부의 전형’, 일하는 농부, 농부의 일 그 자체였다. 그들은 일을 하면서 비현실적으로 즐거워하거나 감상적으로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의 노동에서 피로와 가난, 어쩌면 체념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들을, 그 노동을, 조롱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다. 그 단순하고 고전적인 고요함에서 위엄을 느낄 수밖에 없다.

 

농부 그림은 전통적인 회화의 주제 분류상으로는장르화(Genre Painting)’에 속한다. 우리 식으로는풍속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유형의 그림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 장면을 주제로 한 것이다. 장르화는 역사화나 초상화에 비해 그 격이 낮은 것으로 여겨졌고, 그 분위기도 종교나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의 장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밀레의 농촌 장르 그림에서는 종교나 영웅 주제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엄숙함과 당당함, 때로는 거룩함이 느껴진다. 밀레는 직접 성서의 구절을 연상시키는 장면을 많이 그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림이 이야기에 종속된 삽화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그림과 거기에 그려진 일 자체가 종교성을 가진 존엄한 존재가 되게 한 것이다. 밀레 작품의 종교적인 분위기는 청교도적인 미국 문화에 호소력을 가져 많은 구매자가 생겼다. 그리하여 밀레 작품을 프랑스 다음으로 많이 소장한 곳이 미국이 된 것이다.

 

 

 

 

단순하고 장중한 위엄의 세계

 

미국 보스턴의 화가 애플톤(Thomas Gold Appleton)의 주문에 의해 그린 1859년작 [만종]은 밀레에 대한 비평이 어떻게 요동쳤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림의 전경에 젊은 농민 부부가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다. 후경의 교회에서 들려오는 저녁 기도 종소리에 여성은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남성은 모자를 벗어들고 서 있다. 이 그림의 평화로운 분위기는 사람들을 매혹하여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 방방곡곡에 판화와 사진을 통한 복제본이 퍼지기 시작했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의 [ 모나리자 ]와 같은 전 세계적인 대중성을 갖게 되었다.

 

1889년 이 그림은 루브르 와 미국 사이의 경매 전쟁의 대상이 되어 58만 프랑에 미국에 팔리고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으로 미국 전역을 돌며 전시되었다. 1890년에는 프랑스인 쇼사르(Hippolyte-Alfred Chauchard) 80만 프랑에 사서 1909년 루브르 에 기증했다. 그러나 그때쯤 밀레는 구식이 되었고 그의 그림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만종]은 살바도르 달리 의 분석과 패러디의 대상으로도 여러 차례 등장했다.

 

밀레의 유화보다 드로잉을 더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그의 드로잉은 탁월하다. 유화에는 일하고 있는지 명상을 하는 것인지 구별이 안 되는 사람이 자주 보이는 데 반해, 드로잉 속 인물들은 진짜로 일을 하고 있는 활력 넘치는 모습이다. 정적인 장면을 그린 드로잉의 경우 흑과 백의 표현적인 효과에서 쇠라나 르동을 예고한다. 1865년 이후에는 에밀 가베(Emile Gavet)의 주문으로 파스텔화를 자주 그렸다. 본인은 그냥 데생이라고 부른 밀레의 파스텔화는 밝은 색채와 모자이크 같은 선의 결합으로 인상주의와 드가의 회화에 선행하는 혁신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낮잠]은 그런 특징이 살아있는 대표적인 파스텔화로 반 고흐가 수없이 모사하여 더욱 유명해진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밀레는 여러 색의 선만으로도 빛의 뉘앙스와 양감, 깊이감을 표현하고 있다. [우유를 휘젓는 사람]에서도 밀레는 파스텔로 한편의 이야기와도 같은 농가의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말년의 밀레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풍경화도 그렸는데 1868-74년에 프레데릭 아트만(Frederic Hartmann)에게서 주문받아 그린 [사계] 시리즈 중 []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풍경화들은 자유롭고 회화적인 붓질과 밝은 색상으로 바르비종파와 인상주의 사이의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밀레는 1867년에 만국 박람회에서 열린 회고전 이후 경제적 안정과 명성을 누렸다. 1868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1870년대부터는전원파로 불린 그의 아류도 나왔다. 이들은 대부분 농부를 미화하고, 노동을 찬양하며, 노동에서 고통은 보이지 않는 작품을 그렸다. 밀레의 작품 중에도 상투적이고 허구적이고 감상적인 면이 있는 그림도 있으나, 그의 수작이 가진 힘이 넘치는 투박함, 그 속의 단순함과 무게감은 아류 화가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었다.

 

1874년 밀레는 파리 팡테옹을 장식할 성 주느비에브의 일생 주제 벽화를 주문받았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완성하지 못했다. 병에 시달리던 중인 1875 1 3일 아내와 교회에서 정식으로 결혼하고, 그해 1 20일에 병으로 사망했으나 병명은 명확하지 않다. 그의 시신은 바르비종이 속한 샤이 시의 묘지에, 먼저 세상을 뜬 루소와 나란히 묻혔다. 파리와 런던에서 1975-6년에, 보스턴에서 1984년에 밀레의 회고전이 열려 20세기에도 여전한 밀레의 인기를 보여주었다.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프랑수아 밀레 [Jean-François Millet] (화가의 생애와 예술세계, 김진희)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69137&cid=58862&categoryId=58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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