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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작가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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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작가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14살 외조부에게 처음 합죽선 만드는 것을 배운 이후 60년 세월동안 합죽선에 온 인생을 바쳤습니다.

 

현대적인 것에 사람들이 눈을 돌릴 때 어떻게 하면 우리 전통의 방식을 지킬 수 있을지가 인생의 숙제였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수공으로 해야 하는 작업에 힘들고 손을 놓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지마 수공의 방식을 지키는 것만이 우리 전통을 지키는 첫 거름이라는 생각으로 한 치도 그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저의 인생 60년이 담긴 합죽선을 세상에 내 놓습니다.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을 담은 합죽선과 오랜 시간 함께 해 주시길 바랍니다.

 

- 2019년 6월 김동식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주관 전승활동 김동식 합죽선, 60년>

 

무더운 여름날 높이 뻗은 대나무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청량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 대나무에 선자장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수 백 번 닿으면,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합죽선이 탄생하게 됩니다.

 

오늘날 부채는 여름철 더위를 식히는 도구로 주로 인식되지만, 과거에는 불을 피우거나 곡식을 골라내는 용도는 물론 혼례 등 의례에서도 중요하게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대나무를 종이처럼 얇게 깎아 맞붙여 부챗살을 만드는 합죽선은 휴대성이 뛰어난 한편, 선면의 그림이나 글귀로 자신의 품위를 은은하게 드러낼 수 있기에 조선시대 선비들의 소지품이나 선물용으로도 사랑받아 옸습니다.

 

이러듯 합죽선은 오랫동안 우리의 일상을 시원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뒤에는 곧고 강한 대나무를 종잇장 보다 더 얇게 깎고 말려 부챗살을 만드는 선자자으이 노력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김동식 합죽선, 60년' 전시에서는 대나무와 한지의 멋을 느낄 수 있는 여러 합죽선을 비롯하여, 60여 년 동안 합죽선을 제작해 온 김동식 선자장의 작업 모습도 함께 만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전시의 중심은 합죽선뿐만 아니라 대나무를 부채로 태어나게 하는 선자장의 손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국립무형유산원은 무형문화재를 널리 알리고 그 전승자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 일환에서 선자장과 합죽선의 아름다움을 알릴 수 있는 전시를 개초하게 되어 매우 기쁜 마음입니다.

 

여름이 시작되는 유월, 대나무와 한지 그리고 선자장의 손길로 이루어진 바람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이번 전시를 위해 긴 시간 준비하신 김동식 선자장님께 감사와 축하의 마음을 전합니다.

 

- 2019년 6월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 원장 김연수

 

 



아래부터는 김동식 작가님 작품들이에요~~~~~^^

 

조각색선 | 40 x 22cm | 살수:30살, 선면:염색한지, 등:대추나무, 변죽:낙죽

 

 

 

 

 

 

개량미니선 | 선면:염색한지, 등: 변죽,낙죽, 오죽, 옻칠

 

 

 

 

 

 

천연염색선 | 54 x 30cm | 살수:40살, 선면:쪽물염색한지, 등:우족, 변죽:낙죽

 

 

 

 

 

 

백접선 | 74 x 40cm | 살수:50살, 선면:한유창목, 등:대추나무, 변죽:낙죽

 

 

 

 

 

 

천연염색쪽물염색한지 | 54 x 30cm | 살수:40살, 선면:염색한지, 등:대추나무, 변죽:낙죽

 

 

 

 

 

 

황칠백접선 | 94 x 50cm | 살수:50살, 선면:황칠한상아, 등:대추나무, 변죽:낙죽

 

 

 

 

 

 

한지선 | 70 x 82cm | 살수:40살, 선면:염색한지, 등:대추나무, 변죽:낙죽

 

 

 

 

 

 

승두선 | 64 x 35cm | 살수:29살, 선면:옻칠한지, 등:우족, 변죽:옻칠

 

 

 

 

 

이 작품 사진들은 작가의 촬영 허락으로 제작 하였습니다.  


이 작품 사진들 안의 그림들은 작가의 허락 없이 무단 사용을 할 수 없습니다


 

 

 

아래는 인사아트갤러리 위치에요~~~~^^

 

 

 

 

 

아래는 김동식 작가님의 부채에 들어가는 한국화를 찾아보았어요~~~~^^

 

 

 

<한국화- 韓國畫>

 

1. 개요

한국의 전통적인 기법과 형식에 따라 그린 회화를 총칭하는 말이다. 흔히 동양화라고도 말하지만 이 경우 일본의 우키요에나 중국의 회화까지도 포함될 수 있다. 솔직히 아주 넓은 의미의 한국화는 고분 벽화까지 한국화로 칠 수 있다.

 

2. 배경

2.1. 고대

고대에도 한반도에는 회화가 그려졌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무덤의 벽에 그려진 고분 벽화가 그려졌고, 신라에서는 말안장의 장니 등에 천마도등의 그림이 남았다. 솔거의 이야기나, 다카마쓰 고분 벽화에 나타나는 고구려 여인의 도상을 보아[1] 이미 삼국시대의 회화가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작가론이나 화론이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어 아쉽다.

2.2. 중세

불교가 발달하면서 불화 유물이 많이 남았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 통일신라기의 국보 196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의 변상도(變相圖) 불화가 있고 고려시대 고려 불화부터는 유물의 수도 많다. 귀족들의 개인 불당에 안치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불화들은 주로 당시 유행했던 관음보살 등의 도상을 표현했다. 고려시대 불화는 조선시대 수묵화와 달리 금니와 여러 안료를 써서 상당히 세밀하고 화려하게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2.3.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를 중심으로 유교의 질서를 반영한 문인화, 수묵화가 유행하였다. 특히 동기창의 남종화론의 영향력이 지대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문인화가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직업 화원이었던 김홍도는 남종화와 북종화를 넘나들면서 여러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조선시대 말에 이르면 장승업같이 중국식 도상을 따르는 방향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서민들은 민화를 향유했고, 조선 후기의 불화도 민화적 양식이 혼합되는 양상이 보여진다.

2.4.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에 한국 회화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주로 일본 남화의 영향을 받아 호분을 많이 사용해 뿌옇게 칠한 그림이 유행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는 고희동 같은 화가들이 일본에 유학해 서양화를 배워온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일본총독부는 독립 의지를 꺾기 위해 자주성을 주장하는 표현을 막고, 향토색을 강조한 그림을 장려하였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안중식, 조석진 같은 화가들이 명성을 얻었으며, 김기창, 김은호, 노수현, 변관식, 이상범, 이용우 등도 활동했다. 이 중 김기창, 김은호, 노수현, 이상범 등은 강제징병을 독려하는 삽화를 신문에 그리는 등의 활동을 벌여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2.5. 1950년대 : 한국화 이전의 동양화단

한국화라는 용어가 미술계에 부각된 것은 해방 이후였다. 해방 이후 한국 화단은 크게 세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식민시기를 맞아 일제 문화 청산을 위해 한국 문화의 발견이라는 문제가 하나였고 이러한 문화를 민족 단결의 수단으로서 혹은 이데올로기 홍보의 수단으로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인가가 두번째였고 나머지 하나는 이런 문화를 비단 한국 내에서만 향유하는 것이 아닌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고자 하는 목적이 마지막 과제였다 이 중에서 한국의 동양화단은 당대 미술계에서 크게 문제가 되었던 소위 '왜정식 미의식'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쉽게 말해 50년대 동양화단은 한국미술의 특질성을 보존하는 방향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동양회화에서 보였던 일본 미술의 흔적을 지우려는 노력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이런 시도는 자연스럽게 한국적인 동양회화라는 논의로 나아가게된다. 그 중 대표적인 글은 1954 8 5일 청강 김영기가 서울신문에 게재한 글이었다. 그는 『현대동양화의 성격 : 시급한 한국 國畵의 성립』에서 '동양화'라는 명칭 자체를 일제의 잔재로 파악하고 민족문화의 확립을 위해서는 한국화라는 용어를 공식적인 용어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그는 동신문에 『회화의 명칭에 대하여: 시급한 한국화의 화풍』, 경향신문에 운보 김기창의 기고문인 『산수화 아닌 동양화를』에 대한 답변으로 『동양화 아닌 한국화를』이라는 글을 써내면서 한국화 용어를 정착시키고자 하였다. 청강 김영기는 한국화 논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이후 70년대 그의 한국화론이 동양화단의 후학들에게 전방위한 영향을 끼치게 되며 오늘날에 와서는 미술사학의 분야에서 한국화라는 용어사 연구의 시발점이 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청강 김영기의 입장과 달리 당시 미술비평가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것은 한국화라는 용어 자체의 냉담함이라기 보다는 동양의 회화 전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대한 반응에 가까웠다.. 가령 윤희순의 경우 1946년 『조선미술사연구』에서 서양화와 비교할 때 동양화가 모방에 불과하다는 시각을 내놓기도 했다. 이들의 동양화에 대한 인식은 일본의 동양화와 한국의 동양화에 대한 유사성이 식민잔재의 잔여물로서 인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미술의 근대화'라는 일제시기 이후 미술비평의 경향에 기인한 바도 있었다. 동양화 전반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구체적인 미술가들에 대한 비판도 잇달았는데 이 시기 청전 이상범의 회화의 경우 안개를 연상케하는 표현법이 일본의 남화를 연상케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렇듯 해방 이후 동양화단은 외부적으로 미술비평가들의 비판과 내부적으로는 왜색의 청산이라는 이중의 과제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까지 겹쳐서 어려움을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50년 한국전쟁과 뒤이은 정치적인 혼란으로 인해 한국의 동양화단이 자체적인 미술이론에 근거한 회화상를 구축하지 못하도록 했다.

 

2.6. 1970년대 : 한국화라는 용어의 탄생

70년대의 시대적인 상황에 있어서 정치적인 변화는 한국 동양화단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지점 중 하나다. 박정희 정권은 문화 정책에 있어서 민족문화에 대한 지원 정책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해방 이후 고대 미술에 대한 관심에 비해 현대 동양화에 대한 제도적인 지원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현실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양화단의 최고 쟁점은 국전 동양화부에서 구상과 비구상 분야의 분리에 관한 문제였다. 이 문제는 특히 동양화의 정체성 문제와도 결부되어서 숱한 논란을 낳았다. 이 대립은 크게 보면 체제순응적이고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기존의 국전과 그러한 국전의 체계를 바꿈으로서 동양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려고 하는 젊은 세대 작가들의 대립이었다. 젊은 작가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묵림회의 동인이었던 산정 서세옥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동양화의 추상을 시도함으로서 산수화 일색의 동양화단에 변화를 꾀하고 이를 통해서 한국 고유의 '한국화'로 나아가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70년대 초기 한국화라는 것이 동양화 전반을 지칭하는 개념이기보다는 기존의 동양화를 대체할 새로운 동양화 또는 전위적인 동양화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했다. 1971년 이경성이 『한국예술지』에 기고한 「미술개관-한국화의 가능성」은 이러한 함의를 가지고 있는 한국화에 대한 비판에 다름 아니었다 또한 동년 『신동아』에 올라온 박용숙의 기고문인 「한국화단 유감 - 한국화의 원류와 개념」에서도 국전과 갈등을 빚었던 미술가들의 자신의 작품들을 한국화로 규정했고 이로 인해 한국화에 대한 용어가 논쟁의 도마에 올랐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주지해야 할 사실은 이 시기 한국화라는 용어 자체가 젊은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한정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였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50년대 김영기의 논의에서도 언급되었듯 한국화라는 용어는 기실 한국에서 그려진 동양회화 전반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 개념은 당시 동양화단의 전반적인 지지를 얻지는 못했지만 일부 회화의 경우 그 용어가 언급되기도 하는데 조선시대의 회화를 한국화로 부른다던다 소정 변관식의 회화를 한국화로 소개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당시 한국화라는 용어는 꽤나 중층적인 의미를 가진 용어였고 때에 따라서는 그 용어의 이미가 상충되는 경우도 존재했었다 이를 두고 몇몇 미술사가들은 70년대 한국화 논의 당시 평론가들의 부정적인 반응이 이런 용어의 혼재에서 연유하였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2.7. 1980년대 : 한국화라는 용어의 정착과 현재

한국화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동양화단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79년 말이었다. 이 시기 한국화라는 용어는 비단 특수한 화가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나 특정 시대의 회화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닌 한국의 동양화를 일컫는 전반적인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화라는 용어 사용에 있어서 1983년의 변화는 주목할만 하다 우선 교육의 측면에서 1981 12월 교육과정을 재편과 함께 1983년 기존의 동양화라는 명칭을 한국화로 바꾸어 표기하였다. 미술계에서도 1982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동양화를 한국화 부문으로 지칭한 것이 변화의 시발점이 되었다[2] 이후 동양화를 다루는 각종 전람회, 회고전, 기획전 등에서 한국화란 용어가 널리 정착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80년대에 이르면 한국에서 탄생한 동양화 전반에 대해 한국화라는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이런 변화를 잘 알려주는 사례가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에서 드러난다 1978년 국립현대미술관은 기획전에 맞추어 『한국현대미술사 : 동양화』라는 책을 발행했었다 그런데 이 책은 이후 84년 수정 보완되어 재출간 될 때 동양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근대 한국화의 흐름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용어에 큰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1985년 『미술세계』 11월호에 올라온 이석구의 기고문은 당시의 상황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는 한국화의 현주소를 진단하며 "한국화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채 몇 년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한국화 논의의 출발점을 청강 김영기의 기고문들과 활동들로 잡고 있다 이런 관점은 최근에 와서 몇몇 반론이 제기되기 전까지는 한국화 용어의 기원에 대한 논의에서 정설로 취급되고 있었다. 정리하면 한국화에 대한 논의는 (김영기의 주장에서 알 수 있듯) 식민지 시대의 문화의 청산이라는 문제와 맞물려 제기되었고 그것은 50년대 한국 화단이 당면했던 세 가지 주요한 문제와도 연관되었다. 이후 한국화라는 용어는 70년대까지 한정적으로 사용되다가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를 거쳐서 동양화단에 정착했다.

 

3.쟁점

3.1. 용어의 모호함

한국화라는 용어의 탄생배경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화라는 용어는 기존의 동양화라는 개념에 대한 반대급부로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 미술의 역사를 보았을 때 한국의 회화는 동양의 회화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화는 엄밀히 정의하면 사실 동양화의 일부로 이해해야 한다 그 점은 중국이나 일본이 각기 중국화나 일본화라는 용어를 설정하고 그것의 상위 범주로서 동양화를 설정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한국화의 논의에 있어서 동양화는 한국화라는 용어에 반대해 탄생했고 용어의 의미를 한국만의 고유한 미술문화를 표현한 회화로 설정했기에 용어의 의미가 모호해진다는 점이 있다 이 점은 특히 50년대와 70년대 청강 김영기의 한국화 논의에서 동양화라는 용어 사용에 반대하며 "동양화라는 용어를 쓴다는 것은 민족 의식의 주체성이 없다는 표시이고, 민족예술의 특성을 보일만한 풍성이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한국화라는 용어 사용이 더 적절하다"고 지적하는 바람에 문제가 되었다.

3.2. 진정한 한국화란 존재하는가?

김영기의 논의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화는 민족의식을 드러내고 민족문화의 고유한 특질을 드러내는 동양회화를 지칭한다. 하지만 이런 관점을 한국 동양화단의 역사에 겹쳐볼 경우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김영기의 관점이라면 70년대 한국 동양화단의 젊은 작가들이 전개했던 동양적인 추상은 엄밀한 의미에서 한국화로 분류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서세옥을 기수로 하는 젊은 작가들은 분명 서양식 엥포르멜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영기의 지적대로라면 70년대 비구상미술을 그렸던 젊은 화가들의 작품은 당대에 그들을 한국화로 불렀던 것과는 달리 서양화로 불러야 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또한 오늘날의 견지에서 동양화와 서양화의 구분 자체나 너무나도 모호하게 되어 버렸다. 예를 들어 동양화 기법으로 마이클 잭슨을 그리는 손동현은 한국화가인가 현대미술가인가 묻는다면 모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 한국화 기법으로 그리는 것이 한국화인가, 아니면 전통 한국화가 그려온 소재와 주제를 그리는 것이 한국화인가, 그도 아니라면 한국화만의 특징을 드러내 그리는 것이 진정한 한국화인가? 2000년대 이후 동양화단은 매체와 주제의 선택에 있어서 기존의 전통 회화에 구애받지 않고 서양화와 한국화 심지어 미디어아트를 넘나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론가들과 미술사학자들은 기존의 한국화 용어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보는 중.

 

4. 특징

이하의 서술들은 한국화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반의 회화까지도 포괄적으로 해당되는 내용이 많이 있다. 이는 한국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로 먼저 알고 있어야 하는 사안이다. 미술 전공자가 있다면 한국화만의 특징을 발견할 시 구분해 주기 바람.

4.1. 형식적 특징

4.1.1. 수묵

서양화와 비교했을 때 동양화에서는 특히 수묵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이 재료의 차이는 외형 면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불러왔는데, 위에 덧그려 수정할 수 있는 유화와 달리 한번 먹이 스며들어 번지면 수정하기가 어려운 수묵화는 그 특성상 꼼꼼히 덧그리는 것보다 일필휘지로 그리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동양의 회화가 붓과 먹으로만 그려지는 것이 아니다 수묵화라 하더라도 채색이 가해지는 경우도 존재하는데 청록산수같은 장르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가을의 산이나 여름의 산을 표현할 때는 담홍색의 안료를 섞어 사용하기도 한다.

4.1.2. 여백

첫째로 한국화는 여백의 미를 중시한다. 여백을 그저 채워야 할 빈 공간으로 여기는 서양화와 달리, 여백도 또 하나의 공간이라 여기며 그려진 사물이 아닌 그 나머지를 차지한 여백(공기)의 흐름이 작품의 공간을 차지한다고 여긴다. 이 때문에 동양화를 감상할 때에는 그 빈 부분을 생략하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 무엇이 있을지 상상하며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4.1.3. 다시점

또한 본래의 서양화가 고정된 초점투시를 사용한다면, 한국화는 여러가지 다시점을 한 작품에 담을 수 있는 산점투시를 사용한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전통적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필요한 부분만을 취해 작품에 반영하는 유모취신, 경영위치의 사상을 간직한 한국화는 산점투시를 이용하여 오히려 초점투시보다 자연스럽고 미학적인 구도를 취할 수 있지만 자칫 남용하게 되면 되게 지저분하고 산만해보인다.

이는 산수화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산수화를 보면 특정 위치에서 보고 그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일점투시도법에 따라 그리는 서양 풍경화와 달리 동양의 화가들은 풍경의 여러 부분을 머릿속에서 조합해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단 산수화만 그런 것은 아니다. 건물을 그린 그림을 봐도 오른쪽 처마는 기와가 보이는데 왼쪽 처마는 밑부분이 보이도록 그린 경우가 있다. 이는 일부러 사물의 여러면을 동시에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그린 것이다. 서양이라면 투시도법을 적용하면서 자연스럽게 뒷면을 보이지 않게 생략하고 그렸겠지만, 동양은 그러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외에도 성곽의 남쪽에 있는 건물들은 일부러 뒤집어 그려 성읍의 중심을 기준으로 방사형으로 배치되게 그리는 등의 모습도 간간히 보인다. [3]

 

4.2. 개념적 특징

4.2.1. 육법화론

중국 남제 때 사혁이 저술한 품평서인 고화품록에 쓰여있는 품평하는 법.

기운생동

골법용필

응물상형

수류부채

경영위치

전이모사

4.2.2. 서화동원

글씨와 그림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사상이다. 그 덕분에 선과 운필, 다시 말하자면 필력을 굉장히 중요시 여겼다.

4.2.3. 사의(寫意)

서양화는 전통적으로 회화의 주제가 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따서 재현하려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결과 원근법 같은 개념도 서양에서 처음 출발하여 조선 후기나 되어서야 국내에 전해졌으며, 보여지는 것 그대로를 사생(寫生)한 회화가 잘 그린 회화라는 개념도 동양 미술사에서는 굉장히 희박했다. 이는 매체적으로 동양에서 덧그리기 쉬운 유화보다 수묵화가 발달한 탓도 있지만, 서구 특유의 분석적이고 실증적이며 환원적인 사고방식과 동양의 종합적이고 전체적인 사고방식의 차이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한국화를 비롯한 동양화는 대체로 그림 이면의 의미를 표현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보통 한국화가 서양화보다 은유적이고 명상적이며 주관적이고 관념적이라 여기는 까닭이 이 때문인데, 한국화는 얼마나 닮게 잘 그렸나를 중시하기보다는 얼마나 그 사람의 생각이나 의중(意中)을 잘 표현했나를 더 중시한다. 이를 보통 사의(寫意)라고 부른다. 똑같은 산을 그리더라도 서양화에서는 재현적인 회화를, 동양화에서는 관념화된 회화를 그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특히 중국 명나라 말의 서화가 겸 이론가인 동기창(董其昌)이 제창한 남종화를 따르는 문인화 쪽에서 이런 경향이 더 두드러진다.[4] 사진의 등장 이후 현대미술 또한 재현 메타에서 벗어나 개념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기 때문.[5]

 

한 예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보자. 서양미술의 기준으로 보면 이는 잘그린 그림이 아니다. 선도 똑바르지 않고, 집 뒷부분이나 입구 방향을 봐도 틀린 원근법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당시 사대부들은 김정희의 그림을 잘그렸다고 칭찬했는데, 이는 김정희가 유배 생활로 겪는 고통이나 상실감을 잘 표현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런 문인화의 경향은 시서화(詩書畵) 삼절이라는 개념과도 연결되는데, 당시 양반들이 그림뿐 아니라 그 그림에 붙는 제시나 글도 중시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글과 그림이 의도상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수묵화가 발달하고 그림도 글씨처럼 간략하게 그리는 경향이 나타난 건 이런 영향 탓으로 보인다. 그래서 오늘날 한자로 된 제시는 해석하지 못하고 그림만 보는 일반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의도를 제대로 알 수 없어 감동이 반감되는 경향이 있다.

 

주의할 점은 이것이 사실적으로 그리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반례로 윤두서 자화상 같은 초상화가 굉장히 사실적으로 그려진 것을 들 수 있다. 사실 조선시대 초상화는 거짓없이 굉장히 사실적으로 그려져서 오늘날 의사들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무슨 피부질환을 앓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서양 초상화라면 미화해 그리고, 오늘날 현대인이라면 뽀샵질을 했을 흉터나 반점도 그대로 그린 경우가 많다. 원근감이나 양감의 표현 면에서는 몰라도 질감같은 세부 묘사의 표현은 당시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4.2.4. 동음이의의 활용

동양화에서는 유독 동음이의를 이용한 도상들이 많이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박쥐가 있는데, 박쥐 복()자가 복 복()자와 동음이의인 것에 착안해 복을 비는 도상으로 많이 애용된 것이 그 예이다.

 

5. 주요 도상

5.1. 도석인물

도교와 불교(석가)의 인물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말한다.

5.2. 십장생

도교에서 유래된 도상으로, 오래 산다고 믿어진 열 가지 생물[6]을 그린 것이다.

5.3. 일월오봉도

해와 달과 다섯 개의 봉우리를 그린 그림으로 왕권을 상징하는 그림이다.

5.4. 사군자

군자의 미덕,인격,품격등을 표현하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7]를 말한다.

5.5. 까치와 호랑이

민화에서 주로 그려진 도상이다. 사실은 호랑이가 아니라표범이라는 주장도 있다.

 

6. 주요 기법

6.1. 삼원법 : 고원, 심원, 평원

6.2.1. 준법

준법(皴法)이란 말 그대로 산과 절벽을 그릴 때 쓰는 기법들을 말한다. 준법은 그 기원을 쫓아가면 원나라 시대에도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까지 원나라 이전의 회화들을 규정하는 준법들은 모두 명대 이후에 규정된 것들이다.[8] 명말청초 시기 강남 문인 산수의 발달과 더불어 화집이 발행이 빈번해졌는데 이 때 왕개가 편집 인쇄한 『개자원화전』에서 체계화하고 정리한 명칭들이 오늘날까지 수용 발전되면서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절대준법: 가로로 긴 선을 그어 ㄱ자와 ㄴ 모양의 선을 반복적으로 그어 일정한 크기의 바위를 나타내는 기법이다.

•하엽준법: 연꽃이파리의 잎맥처럼 바위를 그려 솟아오른 바위의 모양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우점준법: 빗방울 같은 점을 많이 찍어내서 울퉁불퉁한 바위의 표면을 묘사하는 기법이다. 미점준법과는 다르게 비교적 건조한 느낌.

•해색준법: 헝클어진 노끈처럼 그리는 기법이다.

•마아준법:말의 이빨처럼 점을 일자로 불규칙적으로 찍어 나타내는 기법이다.

•운두준법:하얀 구름이 피어오르듯 그린다는 뜻으로 층층이 쌓인 기암들을 표현 할 때 많이 쓰인다.

•부벽준법 : 편필 이라고도 하며 송대 화가 이당이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크게 대부벽준과 소부벽준으로 나눈다. 주로 화층 암석을 표현하는데 사용하며 도끼로 찍듯이 그린다는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거친 표면을 연출하는데 사용한다. 남송 당시 마하파의 화가들이 즐겨썼다. 말 그대로 붓으로 찍어누르듯 그린다. 날카로운 벼랑을 그릴때 많이 사용된다.

•몰골준법 : 윤곽을 그리지 않고 붓의 농담만을 이용해 그리는 것이다. 바위의 괴량감을 표현하고자 할때 많이 쓴다.

•피마준법 : 베를 짜놓은 듯이 그린다는 뜻으로, 먼저 윤곽을 먼저 그린 이후에 몽당붓을 이용해 길이가 길지 않은 선들을 수차례 그린다 이때 담묵에서 심묵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그려준다 오대 시대 화북산수의 대표적 화가인 동원, 거연의 회화에서 빈번하게 보인다.

•미점준 : 원대 미불, 미우인 부자가 창시한 기법으로 붓끝으로 옅은 농담을 반복적으로 쌓아 횡점을 그려 올려서 산세를 표현하며 전체적으로 습윤한 느낌을 주는데 많이 사용된다. 이후 문인화법으로 정착되어 청말까지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6.2.2. 백묘법

면을 사용하지 않고 선의 굵기에만 차이를 두어 선만을 사용해 그리는 기법.

달마도가 백묘법으로 그림 그림이다.

6.2.3. 구륵법

윤곽을 칠하고 색을 채워 그리는 기법으로, 채색화에서 많이 사용된다. 그 특성상 주로 북종화 계열에서 많이 사용했다.

6.2.4. 몰골법

윤곽선 없이 색채 또는 수묵의 농담만으로 물체를 그리믄 고테크닉 전법이다. 주로 꽃잎이 넓은 꽃을 그리는데 많이 쓰인다.

6.2.5. 점법

나뭇잎을 그리는 방법이다.

•개자점: 활엽, 낙엽, 죽엽 들을 그릴 때 많이 쓰인다.

•동엽점: 오동나무, 단풍나무의 잎을 그릴 때 사용하며 간단하게 잎맥 표현도 한다.

•호숙점: 편필법

•송엽점: 말 그대로 소나무의 잎을 표현. 파필법이라고도 한다.

6.2.6. 나뭇가지

•녹각법: 말 그대로 사슴뿔처럼 그리기.

•해조묘법: 게의 발처럼 날카롭게 그리기.

•사점법: 일자점을 비스듬히 겹쳐그리기. (침엽수)

•노근법: 뿌리

6.3. 인물화

•녹각법: 말 그대로 사슴뿔처럼 그리기.

•해조묘법: 게의 발처럼 날카롭게 그리기.

•사점법: 일자점을 비스듬히 겹쳐그리기. (침엽수)

•노근법: 뿌리

6.3.1. 공필법

백묘법이 먹선의 변화를 준다면 이 공필법은 굉장히 세세한 선만으로 그림을 그리는 기법이다. 윤두서 자화상의 그 수염이 공필법으로 그려진 수염이다.

6.3.2. 백묘법

백묘법이 먹선의 변화를 준다.

6.4. 용묵법

•삼묵법: 농중담이 한 붓 안에 들어있는 표현.

•발묵법: 물기가 있는 부분에서 의도적으로 먹을 번지는 표현. 서양의 웻 인 웻 기법과 유사하다.

•삼투법: 담묵 위에 농묵이 스며드는 표현.

•파묵법: 먹이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겹쳐 그리는 표현

•적묵법: 칠한 먹이 마르면 그 위에 덧칠하는 표현. 예나 지금이나 쓰기 힘든 테크닉이다.

•퇴묵법: 물맛이 나는 붓을 사용

•선염법: 종이를 적당히 적셔 먹을 사용해서 번지도록 함. 안개를 표현 할 때 좋다.

 

7. 종류

•선종화

•수묵화

•화조화

•문인화

•민화

•탱화 (불화)

•사군자화

•시의도

•초상화

영정

•풍경화

산수화

진경산수화

•풍속화

•화조화

•춘화

•입시 한국화[9]

도움말 한국화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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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 韓國畵 ]

 

 

 

정신적 · 상징적인 미와 선을 중시하고 여백을 두어 암시적인 표현을 함. 한국화의 종류는 재료에 따라 수묵화, 수묵 담채화, 채색화로 나누어지고, 표현 기법에 따라 몰골법, 구륵법, 백묘법으로 나뉜다.

 

(1) 한국화의 종류

<수묵화>

묵색의 농담(濃淡)으로만 표현하며 문인화, 사군자가 여기에 속한다.

<수묵 담채화>

주로 묵색으로 그린 후 엷게 채색하여 표현한다.

<채색화>

채색을 주로 하여 표현하는 것으로 진채화, 농채화가 있다.

 

(2) 표현 기법

<몰골법>

윤곽선이 없이 먹의 농담이나 채색만으로 형태를 표현한다.

<구륵법>

먹으로 윤곽선을 그린 후 먹의 농담이나 채색으로 표현한다.

<백묘법>

묵선만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일종의 선묘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화 [韓國畵] (Basic 중학생이 알아야 할 사회· 과학상식, 2007. 2. 20., 이안태)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24745&cid=47327&categoryId=47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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