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경 작가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나는 내가 직접 경험한 사물, 자연, 장소와 시간을 그린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꽃, 새, 사람 그리고 심볼 등을 표현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내온 메이시스 백화점도.
힘든 투병생활을 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인생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되었다.
그리고 사게절을 보내면서 느끼는 감정도 하나하나 소중하고 간절했다.
비를 맞고 있는 새, 천사 모습을 한 사람, 지나온 시간과 미래에 맞이할 인생도 초생달 아래 클로버 무리는 희망을 작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꽃 속에 누워있는 사람은 나 자신이기도 하고, 시련을 견뎌내고 미래를 꿈꾸고 있는 모든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미래를 꿈꾸고, 희망은 나를 화폭에 담아낸다.
- 작가노트
감사의 글
그대를 괴롭히고 슬프게 하는 일들을 하나의 시련이라고 생각하라.
쇠는 불에 달구어야 강해진다.
그대도 지금 당하고 있는 시련을 통해서 더욱 마음이 굳세질 것이다.
M. 아우렐리우스
이번 전시는 작년 전시의 감정을 좀 더 확장 시켰습니다.
그림에 좀 더 집중하다 보니, 좀 더 다양하게 표현되었습니다.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동안, 앞을 보면 마치 안개 자욱한 길에 있는 느낌입니다.
하루, 한달, 한해가 지나 이제 뒤를 보니, 작년에 비해 멀리 와 있습니다.
그만큼 성장했나 봅니다.
이렇게 다시 개인전을 할 수 있게 도와준 친지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김미경 작가님은 성신여대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원광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셨어요~~~^^
개인전은 3회 하셨어요
개인전을 한 곳은
2019 개인전(가나인사아트센터)
2018 개인전(가나인사아트센터)
1994 개인전(청남아트갤러리)
에서 전시를 하셨어요.
단체전은 6회 하셨어요~~~~^^
단체전을 한 곳은
2018 제25회 한국미술국제대전
2018 계절의 경계전(에이블파인아트)
2017 마음놓아주다전(갤러리램번트, 경인미술관)
2017 청년작가전(갤러리램번트, 경인미술관)
2004 난원전(종로갤러리)
1992 열림전(전주)
에서 전시를 하셨어요~~~~~^^
아래 부터는 김미경 작가님 작품들이에요~~~~^^
Sunflowers in a vase at window | 53 x 45.5cm | Acrylic on canvas | 2018
Flowers and bird in the night | 45.5 x 37.95cm | Acrylic on canvas | 2018
Macy's in fall | 53 x 45.5cm | Acrylic on canvas | 2018
Flowers blooming in my eye | 72.7 x 60.6cm | Acrylic on canvas | 2018
Flowers in a vase II | 72.7 x 60.6cm | Acrylic on canvas | 2018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 | 72.7 x 60.6cm | Acrylic on canvas | 2018
꿈꾸는 사람 III | 90.9 x 72.7cm | Acrylic on canvas | 2018
Bird on the at night | 45.5 x 37.9cm | Acrylic on canvas | 2018
Bird on the rock at day | 45.5 x 37.9cm | Acrylic on canvas | 2018
Sister in prayer | 45.5 x 37.9cm | Acrylic on canvas | 2018
<내가 본 전시회 느낌>
김미경 작가님 작품들의 주제는 주로 작가님이 직접 경험한 사물, 자연, 장소, 시간을 주제로 그리셨어요.
김미경 작가님의 작품들은 사물을 단순화, 친근감이 느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김미경 작가님의 작품을 보게 되어서 행운이였고 다음 전시회가 또 기대가 되네요.
이 작품 사진들은 작가의 촬영 허락으로 제작 하였습니다.
이 작품 사진들 안의 그림들은 작가의 허락 없이 무단 사용을 할 수 없습니다.
아래는 인사아트갤러리 위치에요~~~~^^
아래는 김미경 작가님과 같은 추상주의 찾아보았어요~~~~^^
추상화[ Abstract Painting, 抽象畵 ]
정의
가시적 형상을 모방해서 재현하는 방식을 벗어나 점, 선, 면, 색채의 순수조형 요소로 구성한 그림.
개설
한국의 추상화는 1930년대 중반 경 일본에서 유학하던 몇몇 젊은 미술학도들에 의해 시작된 이래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전후 1세대 청년 작가들이 주도한 앵포르멜 미술에 이르러 현대미술의 주류가 되었다. 전후의 혼란스러운 사회와 기성 화단에 저항하며 집단적 미술운동의 성격을 뗬던 앵포르멜(Informel) 미술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추진력을 상실하여 경화현상을 보였고, 해프닝(Happening), 개념미술(Conceptual Art) 등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는 세대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1970년대 중반 경에 시작된 단색조 회화에 의해 재차 추상화의 시대를 맞이하기까지 오리진(Origin) 그룹의 몇몇 화가에 의해 기하학적 추상화가 한국 추상화의 맥을 이어갔다. 단색조의 추상화는 서구 모더니즘 미술 이론의 평면성과 균질성을 한국의 백색(白色), 동양의 자연관 및 정신과 결합시켜 ‘한국적 모더니즘’이라 일컬어지면서 1980년대까지 화단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민중미술 및 신형상회화의 도전과 1990년대에 도래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기류에 의해 추상화의 열기는 서서히 식어갔다.
내용
한국에서의 추상미술은 1930년대 중반경 일본에 체류하던 김환기(金煥基), 유영국(劉永國), 이규상(李揆祥) 등 극소수의 청년 미술학도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김환기는 몬드리안(Piet Mondrian)류의 구성에 서정성을 가미한 추상 작품을 하였고 유영국은 판 부조의 순수기하학적 도형을, 이규상은 기호적 구성작업을 전개하였다. 이들 한국 추상미술 1세대의 해방 이전 활동은 일본의 전위 단체전인 자유미술가협회전(自由美術家協會展), 미술문화협회전(美術文化協會展), 이과전(二科展)의 구실회(九室會) 등을 통해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국내 활동과 영향력은 미미했다.
일제강점기에 전개된 추상미술에 이어서 2기 추상미술은 전후 1세대 화가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피식민의 역사와 전쟁을 겪은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규범과 가치, 특히 국전을 장악한 기성 미술계에 도전하여 프랑스의 앵포르멜과 미국의 액션페인팅(Action Painting)으로부터 비정형의 격정적 표현주의를 흡수하였다. ‘앵포르멜’ 혹은 ‘격렬한 추상표현주의 미술’이라고 불리는 전쟁 직후의 추상미술 조류는 1958년 제2회 현대미술가협회전(現代美術家協會展)을 시작으로 196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미술전람회(大韓民國美術展覽會)를 장악할 정도로 유행하였다. 1960년대 말경에 이르러 새로운 시대의 도전에 직면하여 종언을 고하고, 오리진 그룹만이 기하학적 추상으로 추상화의 역사를 변화, 지속시켰다.
1975년에 일본 도쿄화랑(東京畵廊)에서 기획한 ‘다섯 가지 흰색전’을 시작으로 1980년대까지 화단을 풍미했던 단색화는 화면의 평면성과 균질성이라는 모더니즘 회화의 이론을 수용하는 동시에 백색의 비물질성, 정신성에 집중하여 민족성을 표방하였다. 일루전의 반영으로서의 회화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인 회화로서 미니멀리즘(Minimalism) 미술을 표방하면서도 민족적 감성에 접근함으로써 단색화는 ‘한국적 미니멀리즘’으로 평가받았다.
계급의식과 소통을 주장하는 1980년대 민중미술 계열의 도전, 유럽 신형상회화의 유입, 199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적 기류의 수용에 따라 ‘집단 개성’이라 불릴 정도로 미술계를 단일화시킨 단색조 추상화의 기세는 소진되었고, 다시 구상의 복권이 이루어지는 한편 네오 제오(neo-geo), 포스트 컨셉츄얼리즘(Post-Conceptualism) 등의 추상형식의 미술이 전개되었다. 21세기 초의 추상미술은 열린 추상, 포스트모던적 추상, 후기 추상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모더니즘의 비판적 성찰을 위한 개념작업으로서의 추상을 시도한다.
의의와 평가
1930년대에 일본의 전위적 미술단체에 참여하는 활동으로 시작된 한국의 추상화는 식민 상황 속에서도 추상미술의 국제성과 보편성을 수용하였다. 이후 형상미술의 복권에 의해 부침을 계속하면서도 국제성과 한국성의 공존을 위한 모색을 시도하여 ‘한국적 모더니즘’이라는 고유의 추상화를 창안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추상화 [Abstract Painting, 抽象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459103&cid=46660&categoryId=46660
추상화
1.추상화
미술에서 사물을 눈에 보이는 것처럼 자연적,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점, 선, 면, 색채 등의 표현을 목표로 하는 그림, 혹은 그 기법. 보통 부드러운 선으로 이루어진 것은 뜨거운 추상, 직선으로 간단명료하게 구성된 것은 차가운 추상이라고 부른다. 앞의 예로는 칸딘스키가 있고, 뒤의 예로는 몬드리안이 있다.
원래 목적은 현실의 정치, 이념, 경제논리 등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미적인 것만을 표현하자는 열망에서 시작되었다. 그 결과 선전의 수단이 될 수 있는 인물 묘사를 배제하게 되었다. 나아가 클레멘트 그린버그 같은 이론가는 회화는 회화다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회화 이외의 요소는 전부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무슨 의미냐면, 서사는 문학에서 온 것이니 회화에서 스토리도 배제해야 하고[1], 입체감은 조각에서 온 것이니 음영같은 것도 넣지 말아야 하며, 공간감은 건축에서 온 것이니 원근법도 도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되자 점, 선, 면, 색채 같은 조형요소 그 자체의 아름다움만을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물 묘사마저 거부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어찌보면 근본주의?
이는 당시 모더니즘을 추종하던 다른 분야의 예술가, 건축가, 이론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스 반 데어 로에, 르 코르뷔지에 같은 건축가나 디자이너 모홀리 나기가 대표적. 이들은 사물에는 핵심구조가 있으며, 이 구조를 추려내는 것이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추상화한 결과물은 누구나 좋아하고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 때문인지 모더니즘은 회화, 디자인, 건축 할 것 없이 굉장히 단순한 구조를 강조하게 되었다. less is more
하지만 이렇게 모든 대상을 미분화미분화시키고 단순화시켜 버리는 방식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었는데, 오래 보면 지루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은 미술의 가능성과 다양성을 억누르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후대 예술가들은 이에 반발하는 작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
다만 추상이 탐구하고 개발한 각종 이론과 기법들은 오늘날 디자인 분야에서 유용하게 써먹고 있다. 당장 미스 반 데어 로에나 칸딘스키 등이 참여했던 디자인 학교가 바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인 바우하우스다. 애플사에서 강조하는 단순한 미니멀리즘 디자인도 어찌보면 이 영향권 하에 있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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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amu.wiki/w/%EC%B6%94%EC%83%81%ED%99%94
<추상화 작가들>
차가운 추상 - 피에트 몬드리안[ Piet Mondria(a)n]
네덜란드의 화가, 추상회화의 선구자. 자연주의적 수법으로 풍경, 정물 등을 그렸으나, 마티스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후부터 추상화를 그렸다. 추상화가들과 ‘데 스틸’그룹을 결성하였고, 신조형주의인 네오 플라스티시즘을 창도하였으며 20세기 조형이론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출생 - 사망 :1872. 3. 7. ~ 1944. 2. 1.
출생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부근의 아메르스 포르트
직업 : 화가
네덜란드의 화가로, 추상회화의 선구자. 암스테르담 부근의 아메르스 포르트에서 출생, 뉴욕에서 사망. 암스테르담의 미술아카데미에서 배움. 경건한 칼빈주의자인 부친의 영향에 의해 20대 후반부터 신지학(神智學)에 몰입, 후년의 회화에서의 절대성 추구의 연원을 이룬다.
처음엔 자연주의적 수법으로 풍경, 정물 등을 그렸으나, 1908년 마티스의 작품에서 순수색에 감명받아 1910년 파리로 나아가 큐비즘으로 전신, 『나무』의 연작등을 통해서 추상화의 노력을 시작한다. 1914년 귀국해서 1917년 두스브르흐 등 네덜란드의 추상화가들과 「데 스틸」그룹을 결성, 본격적으로 순수추상운동을 전개한다(1925년 그룹 이탈). 1919년 파리로 돌아가 다음 해 파리에서 신조형주의(네오 플라스티시즘)를 창도했다. 제 2차대전의 위기를 느끼고 1938년 런던에 이주하였고, 1940년 뉴욕으로 건너가 만년의 충실한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일체의 구상성(具像性)을 버리고, 수직선과 수평선에 구조의 원리를 두어 원색의 정방형, 장방형의 배치에 의해, 지고(至高)의 질서와 균형을 구했다. 도시와 건조물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의 사상은 20세기의 조형이론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만년의 대표작에는 『브로드웨이 부기우기』(1942~1943, 뉴욕현대미술관)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피에트 몬드리안 [Piet Mondria(a)n] (미술대사전(인명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6427&cid=42636&categoryId=42636
뜨거운 추상 -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러시아 태생의 화가. 추상미술의 아버지이자 청기사파의 창시자로 사실적인 형체를 버리고 순수 추상화의 탄생이라는 미술사의 혁명을 이루어냈다. 미술의 정신적인 가치와 색채에 대한 탐구로 20세기 가장 중요한 예술이론가 중 한 사람으로 불리며, 바우하우스의 교수로도 재직했다.
출생-사망 : 1866.12.16 ~ 1944.12.13
국적 : 러시아
활동분야 :회화
출생지 : 러시아 모스크바
주요저서 :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On the Spiritual in Art》(1911), 《점 ·선 ·면 Point and Line to Plane》(1926)
주요작품 :
《즉흥 26 Improvisation 26》(1912), 《교회가 있는 풍경 Landscape with Church》(1913), 《구성 218 Composition No. 218》(1919), 《구성 8 Composition VIII》(1923), 《하늘색 Sky Blue》(1940)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186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1886년 모스크바 대학교에 들어가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성공적인 법학자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그는 189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그림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듬해인 1896년 독일로 건너가 아즈베 미술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1900년에 뮌헨아카데미에서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에게 사사하며 훗날 바우하우스에서 함께 일하게 되는 동료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를 만났다.
칸딘스키는 1901년 팔랑크스 전시협회 및 미술학교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가브리엘레 뮌터(Gabriele Münter)를 만나 이후 몇 년 동안 그녀와 수많은 도시를 여행하며 함께 작품 활동을 했다. 1908년 무르나우로 거처를 옮긴 칸딘스키는 그곳에서 일련의 풍경화를 제작했다. 초기에 그는 화려한 색채의 풍경화나 러시아 민속화에서 영감을 얻은 주제들을 그렸으나, 점차 구상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대상과 상관없이 형태와 색채, 선들 속에서 표현 가능성의 확장을 발견했다. 그리고 음악과 철학, 근대미술과 추상작업에 대한 사상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1909년 그는 캔버스를 매우 자유로운 필치의 점과 색띠로 뒤덮음으로써 추상을 탐험했다.
칸딘스키는 1911년 뮌헨에서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와 함께 아방가르드 모임인 ‘청기사파’를 결성했다. 그의 논문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On the Spiritual in Art》는 청기사파 그룹 탄생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2년 동안 이 그룹은 독일 표현주의 미술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칸딘스키는 독일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민족 계몽을 위한 위원회의 회화분과에서 활동하는 한편, 모스크바 아트워크숍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구성주의에 대해 연구했다.
1922년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에서 회화와 미술이론을 강의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독일로 돌아왔다. 러시아 구성주의의 영향으로 그의 작품은 수학적으로 제한된 엄격한 형태가 지배하게 되었다. 가장 기초적인 형태인 원은 가장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감정적이고 서정적인 색채 사용을 멈춘 적은 없었다. 그는 1933년 나치스의 탄압으로 바우하우스가 강제로 폐쇄하자 파리로 망명을 떠났고 그곳에서 남은 생을 보냈다. 1937년 나치스가 퇴폐예술가라고 지적하여 작품이 몰수당하기도 했다. 그는 1944년 프랑스 뇌이쉬르센에서 78년의 생을 마감했다.
칸딘스키는 현대 추상회화의 선구자로서 대상의 구체적인 재현에서 이탈, 선명한 색채로써 음악적이고 다이내믹한 추상표현을 이루어냈다. 그는 색채와 선, 면 등 순수한 조형요소만으로도 감동을 줄 수 있으며, 형태와 색채가 사물의 겉모습을 그려내기보다 작가의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시각에서 그는 추상미술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을 음악에 비유해 설명했다. “색채는 건반, 눈은 공이, 영혼은 현이 있는 피아노이다. 예술가는 영혼의 울림을 만들어내기 위해 건반 하나하나를 누르는 손이다.”
그가 남긴 주요 작품에는 《즉흥 26 Improvisation 26》(1912), 《교회가 있는 풍경 Landscape with Church》(1913), 《구성 218 Composition No. 218》(1919), 《구성 8 Composition VIII》(1923), 《부드러운 상승 Gentle Ascent》(1934), 《하늘색 Sky Blue》(1940) 등이 있으며, 또 추상미술 이론가로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On the Spiritual in Art》(1911), 《점 ·선 ·면 Point and Line to Plane》(1926) 등의 저술도 남겼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49206&cid=40942&categoryId=34391
<피에트 몬드리안>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파랑, 빨강, 노랑의 색면과 검정색의 선만으로 이루어진 회화작품이 있다. 종이 위에 어떤 형상을 나타내려는 노력도 없이 3원색의 사각형을 두께를 약간씩 달리하는 검은 선으로 구획지어 놓은 이 그림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도 그림인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미술교과서 어디에선가 본 작품임을 생각해낸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나도 하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혹은 단순한 색면과 검은색 선만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이 깔끔하면서도 딱 떨어지고 뭔지 모를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단순한 작품이 어떤 맥락에서 유명하게 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정작 많지 않다.
사진과는 달리 회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것
이 작품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은 네덜란드 출신의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 - 1944)의 작품이다. 몬드리안이 화가로서 작업을 시작하는 20세기 초반 화단에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닮게 그려내는 능력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당시가 사진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는 때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닮게 묘사해 내는 능력에 있어서 사진을 능가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르네상스 이후 작품 속에서 닮게 그리는 것을 추구해오던 화가들은 이제 사진과 경쟁하기보다는 사진과는 달리 회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아 나서야 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몬드리안 또한 자신이 작품 속에 무엇을 그려야 하고 무엇을 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이 시기 몬드리안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던 ‘신성한 지혜’를 추구하는 모임인 ‘신지학협회’에 가입한다. ‘신지학’은 일반적인 현상들 속에서 보편적인 특성을 끌어냄으로써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신지학의 영향으로 몬드리안은 우리가 보는 사물 속에는 모든 것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본질이 내재해 있으며, 그 본질은 궁극적으로 조화로운 상태를 이루고 있다고 파악하게 된다. 즉, 몬드리안은 우리가 보는 나무, 건물, 일상의 사물들은 그 겉모습은 비록 다를지라도 본질적으로 동일한 조화의 상태를 이루고 있다고 파악하고, 이렇게 일상 속에서 우리들이 쉽게 알아볼 수 없는 사물의 본질을 작품을 통해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화가의 임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무는 점점 추상화되어 기본 조형요소만 남는다
그 결과 몬드리안은 우리 주변의 사물 속에 내재하고 있는 본질을 찾아나가게 되는데, 그의 이러한 과정은 나무 연작을 통해 잘 드러난다. 비교적 초기에 제작된 사실적으로 묘사된 [붉은 나무] (1909-10)는 나무의 형상을 유지하고는 있으나 나뭇가지들은 살아 움직이듯 꿈틀대고 있으며, 나무와 나무를 둘러싼 배경의 색채는 실재하는 색채라기보다는 오히려 나무의 생명력을 드러내려는 듯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붉은색과 하늘색으로 묘사되어 있다.
한편, 바로 다음해에 제작된 [회색나무] (1911)에 이르면 대상이 된 나무는 여전히 나무임을 알아볼 수는 있으나 훨씬 더 간단해 졌다. 이렇게 사물의 형태 및 색채를 간략하게 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몬드리안은 사물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1912년 제작된 [꽃피는 사과나무]에 이르면 제목을 보고서야 이 작품이 나무를 대상으로 하여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게 되며,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나무](1913)에 이르면 화면은 최소한의 색채와 선만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제목을 확인하고서도 화면 속에서 나무의 형태를 파악해 내기는 쉽지 않게 된다.
이러한 단순화 과정을 통해 몬드리안의 화면은 최종적으로 빨강, 파랑, 노랑의 3원색과 흰색과 검정색, 그리고 수직과 수평의 선과 그것들이 교차하는 선만이 남게 되는데, 몬드리안은 이와 같이 가장 기본적인 조형요소 만으로 사물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몬드리안의 믿음을 반영한 작품이 이 글 도입부에서 본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인 것이다. 이렇게 사물의 보편적인 본질을 파악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몬드리안은 20세기의 추상미술의 선구자가 됨으로써, 이후 그의 미술 이론으로부터 영향 받은 많은 미술, 건축, 디자인 운동이 전개된다.
한편, 몬드리안은 자신의 작품이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요소로만 이루어진 것이기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렇게 이루어진 추상미술이야말로 순수함과 완벽함, 조화와 균형을 관객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처럼 몬드리안과 그의 동시대 작가들이 염원한 전 인류가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회화 언어로써의 추상미술에 대한 바람은 그러나 관객들로부터는 어려운 그림, 혹은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데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피에트 몬드리안 Piet Mondrian (1872. 3. 7 ~ 1944. 2. 1)
네덜란드의 근대 미술 화가이다. 몬드리안은 추상화의 초기 화가에 속하며, 네덜란드 구성주의 회화의 거장이다. 빈센트 반 고흐와 야수파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몬드리안의 유명한 신조형주의적인 그림들은 강렬한 추상성이 특징이다. 그의 그림의 주된 모티브는 빨강, 파랑, 노랑 등의 원색을 가진 직사각형 면과 그와 섞인 흰색과 검은색 면, 그리고 검정색 선들이다. 이런 기본적인 형태를 중요하게 다룬 추상화는 신조형주의가 추구한 양식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다.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 피에트 몬드리안 (서양미술 산책, 기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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