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희 작가님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졸업,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대학원 동양화과 석사 졸업을 하셨어요~~~~~^^
이강희 작가님 개인전은 4회 전시를 하셨어~~^^
전시를 한 곳은
2019 One Day(갤러리인사아트, 서울)
2014 보이지 않는 경계(갤러리 엘르 초대전) 갤러리 엘르, 서울
2014 고여 있는 것은 슬프다(미추홀터 기획전) 인천, 미추홀도서관
2011 여러 개의 ‘바라다’ 서울대학교 우석홀, 서울
에서 전시를 하셨어요
단체전은 18회 참여를 하셨어요~~~~^^
전시를 한 곳은
2018 제38회 이원전, 종이 한 장의 차이 – 인간, 토스트 갤러리, 서울
2017 2개의 통로전, 인천대학교 ART SPACE IN, 인천
2016 한국적 미의식과 그 표출, 조선일보 미술관, 서울
2015 차가운 진실- 보이는 것들의 이연, 조성대학교 백학미술관, 광주
2015 신진작가 초대전, 갤러리 지오, 인천
2014-15 색경, 너를 위로하다. 동 스타제이드 x 플랫폼12 기획전, 부산
2014-15 신진작가의 그림을 사옥에서 만나다, 네이버 그린팩토리, 경기
2014 가면의 고백, MoA 서울대학교 미술관, 서울
2014 두 개의 시선, 수호롬 부산 갤러리, 부산
2014 제2회 미래를 보다전 – Part2, 갤러리 엘르, 서울
2014`2014 Art Project 12 by 12, COEX 서울
2013 인천한국화 오늘과 내일전,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가온갤러리, 인천
2012 전통회화 갤러리 초대전(이강희, 전수연), 스페이스 50, 서울
2012 김희진, 이강희, 최가영 3인전, 나무그늘 갤러리 영등포점, 서울
2011 아트코러스-21C 현대미술의 조명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인천
2010 전통의 뿌리와 새싹의 태동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이천
2009 한국화 젊은 발언과 모색전, 인천 신세계 갤러리, 인천
2009 제2회 ASYAAF(아시아 대학생 청년작가 미술축제), 옛 기무사, 서울
에서 전시를 하셨어요~~~~^^
아래 부터는 이강희 작가님 작품들이에요~~~~~^^
햇볕 아래 | 88 x 72cm | 장지에 채색 | 2018
언덕에서 | 29 x 41.5cm | 장지에 채색 | 2018
어떤 이의 밭 | 72.5 x 72.5cm | 장지에 채색 | 2019
바라보다 | 70 x 132cm | 장지에 채색 | 2019
바라보다 | 70 x 132cm | 장지에 채색 | 2019
여름 끝자락 | 70 x 132cm | 장지에 채색 | 2019
안녕 | 72.5 x 72.5cm | 장지에 채색 | 2019
One Day | 75 x 73cm | 장지에 채색 | 2018
안녕 | 72.5 x 72.5cm | 장지에 채색 | 2019
발아래 | 72.5 x 72.5cm | 장지에 채색 | 2019
그자리 | 72.5 x 72.5cm | 장지에 채색 | 2019
공원에서 | 72.5 x 72.5cm | 장지에 채색 | 2019
흐린날 | 72.5 x 72.5cm | 장지에 채색 | 2019
안녕 | 72.5 x 72.5cm | 장지에 채색 | 2019
공원에서 | 72.5 x 72.5cm | 장지에 채색 | 2019
안녕 | 50 x 72cm | 장지에 채색 | 2019
숲 속 | 110 x 82cm | 장지에 채색 | 2019
바닷가 | 72.5 x 72.5cm | 장지에 채색 | 2019
이강희 작가님 전시 유투브 URL
<내가 본 전시회 느낌>
이강희 작가님 작품들의 주제는 자연환경인 풍경화를 주로 그리셨어요.
이강희 작가님 작품을 풍경화가 존 컨스터블의 그림이 생각이났어요.
이강희 작가님의 작품들은 맑은 날씨에 자연풍경을 보는듯한 산뜻한 색상으로 작업을 하셔서 그
런지 마치 밖으로 소풍을 나온듯한 느낌을 받은 것 같아요.
이강희 작가님의 작품을 보게 되어서 행운이였고 다음 전시회가 또 기대가 되네요.
작품 사진들은 작가 및 관련 관계자의 촬영 허락으로 제작 하였습니다.
이 작품 사진들 안의 그림들은 작가 및 관련 관계자의 허락 없이 무단 사용을 할 수 없습니다.
아래는 갤러리인사아트 위치에요~~~~^^
아래는 이강희 작가님의 작품 같은 존 컨스터블 작가에 관련해서 찾아보았어요~~~~~^^
<존 컨스터블 [ John Constable] >
출생 - 사망: 1776.6.11. ~ 1837.3.31.
우리는 흔히 한 지역에 오래 머문 사람들 두고 '토박이'라는 별칭을 붙여준다. 토박이들은 그 지역에 오래 머물며 지역의 특징과 풍물에 대해서 잘 알고 또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외지인들이 잘 찾아내기 힘든 그 지역만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서 노력한다. 영국의 풍경화가이자 근대 풍경화의 시초로 알려져 있는 컨스터블은 이렇듯 영국 풍경의 아름다움과 평생을 함께한 영국식 토박이였을지도 모른다.
● 근대 풍경화의 시초 – 존 컨스터블
터너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또 한 명의 영국 화가이자 프랑스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사람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6)이다. 영국의 동부지역인 서퍽 출신인 그는 제분업자의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서신을 통해서 자신을 화가로 만든 것은 “조심성 없었던 어린 시절 Careless Childhood”이라고 말하고 있다. 작품들을 통해서 시골의 풍경을 실감나게 묘사했던 컨스터블은 특히 서퍽 지방의 농촌을 많이 그렸는데 이를 통해 그의 고향에 대한 큰 애착을 느낄 수 있다.
그가 태어난 영국의 남동부 지역은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특징으로 하는데, 1년 365일 동안 같은 날씨를 찾기 힘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한 날씨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지역이다. 컨스터블은 빛과 바람의 효과, 이슬이 맺힌 듯 보이는 아침 풍경 등 좀 더 정확하고 객관적인 관찰을 통해 자연의 현상을 화폭에 담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작업 속에 드러난 자연의 세밀한 묘사는 어쩌면 그의 어린 시절 경험한 지역 토박이들만이 알 수 있는 풍경의 변화, 즉 다양한 날씨에 따른 풍광의 변화를 몸소 체험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후 왕립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그림 공부를 한 그는 꾸준한 전시회와 작품 활동으로 화가로서의 입지를 넓혀갔다. 현대에 이르러 그의 작품 및 화풍이이후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준 것으로평가되고 있는 컨스터블이지만, 당시 그는 영국 내에서는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1824년파리의 살롱전에서 자신의 작품 3점을 선보이게 된다. 그 중 [건초마차 The Hay Wain](1821)는 살롱전의 금메달 수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동시에 그는 프랑스 화단의 큰 관심을 얻게 되었다.
● 크기로 압도하는 풍경
2006년 영국의 테이트 브리튼에서 열린 컨스터블의 전시는 ‘컨스터블의 6 피트의 캔버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림의 가치를 판단함에 있어서 그림의 크기는 부수적인 요소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미술관을 찾았을 때 커다란 캔버스 앞에서 그림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는 경험을 떠올려 보면, 그림의 크기가 화가의 뛰어난 능력을 넘어서는 그림의 아우라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건초마차]를 비롯한 [스튜어 강 유역의 풍경] 연작, 그리고 [헤드레이 성](1829)과 [초원에서 바라본 솔즈버리 성당](1831)과 같은 6피트가 넘는 그의 후기 유화 작품들은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가 이러한 큰 캔버스 작업에 몰두하게 된 시기는 대략 1818년에서 1819년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는 그의 작품 활동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었다. 터너가 자신의 작품이 좀 더 돋보일 수 있는 장소로 왕립 아카데미보다 자신의 작업실을 사용했던 것처럼, 컨스터블이 이렇게 커다란 규모의 캔버스를 사용하는 것에 매력을 느꼈던 이유는 자신의 작품이 왕립 아카데미 전시에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조금 더 눈에 띌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러한 이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풍경화가 좀 더 고전적인 회화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을 그림의 크기에서 찾으려 했다.
그가 작품에서 실현한 자연스러운 화면 처리는 신고전주의의 방법론에 의해 얻어진 것이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자연을 관찰하며 숲, 나무, 하늘, 구름 등을 아주 세밀한 드로잉 또는 수채화 습작으로 연습했다. 그 다음 자신이 계획했던 크기의 규모로 스케치 작업을 한 뒤, 전체 구성에 맞추어 그림을 완성해 갔다. 그는 완성한 작품의 표면 처리를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고, 색료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유품에는 4개의 팔레트와 붓이 들어 있는 나무 스케치 박스, 그리고 분필 집게, 물감 나이프, 병 속의 색료 등이 있다. 남겨진 팔레트들을 살펴보면, 그가 즐겨 사용하던, 에메랄드 빛이 도는 초록색과 노란색 염료, 코발트 블루, 하얀색 색료가 남아 있으며, 또한 그가 사용했던 아마인유와 섞인 송진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재료들에 의해 표현된 작품의 표면은 관람자로 하여금 풍경의 생생한 바람과 빛을 느끼도록 해 주며, 마치 그곳에 서 있는 듯한 자연스러움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특유의 반투명의 윤기 나는 표면과 하얀 점으로 표현된 도드라지는 하이라이트로부터 나온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말년에 이르러 이러한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자연 현상을 관찰한 덕분이었다. 동시대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터너가 해외로 그림 여행을 했던 것과는 달리 컨스터블은 영국 국내의 풍경, 특히 자신이 머물고 있는 지역의 풍경을 반복적으로 그리기를 즐겼다. 이는 풍경 자체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매 순간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같은 장소에서 관찰함으로써 '자연의 진실'을 화폭에 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 구름을 통한 회화 기법의 연구
1819년 여름부터 햄스티드에 머물렀던 컨스터블은 이 곳 풍경을 여러 차례 그렸다. 지평선을 중심으로 하늘과 땅이 반으로 나뉘어 있는 구성은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의 영향을 받은 당시 영국 풍경화의 전형적인 구도를 보여준다. 하지만 땅과 하늘 그리고 멀리 보이는 초원의 색은 이전의 풍경화들에서 사용된 중간 계열의 은은한 색조가 아닌 강렬하고 표현력 강한 색들로, 각각의 에너지를 내뿜으며 전체 풍경의 분위기를 생기있게 만들고 있다.
회화의 기법적인 측면에서 컨스터블의 구름 연구는 당시 새로이 중요하게 부각된 회화의 기법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야외에서 유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현재의 우리들에게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가져온 미술 역사상의 영향력은 실로 혁명적이었다. 자연으로부터 오는 즉각적인 경험을 바로 유화로 옮기는 기술은 단순히 기법적 차원을 넘어서 화가의 눈에 의해 직접 기록된 경험 그 자체가 예술적 창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근대적인 회화의 개념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이러한 연구가 독창적인 것은, 단순히 자연의 현상적인 부분을 묘사하고 표현하려 하지 않고, 자연의 변화 과정 혹은 순간의 모습들을 담으려 했던 시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유화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화가들에게 있어서 주제와 소재를 미리 결정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시작해야 하는 작업인데, 그는 마무리 작업에 쓰이는 회화 기술들을 이 드로잉 작업에 사용한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는 야외에서 습작을 한 후, 자신의 작업실로 돌아와 작품들을 큰 크기로 다시 구성했다. 이러한 습작 작업은 그에게 자연에서 느낀 경험을 지속시키는 가장 중요한 기초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위해서 유채를 통한 습작을 시도했다.
유화로 그려진 하늘과 구름의 형태 그리고 깊이감은 수채화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또한 즉석에서 하나의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도록 전체적으로 새로운 자연의 색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 빠른 손놀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들을 화폭에 담기 위해서 집중력 있게 관찰했고, 그가 스스로 고안한 도구들과 재료들을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의 말년 작품들의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 컨스터블 그리고 프랑스 인상주의
이러한 자연의 효과는 프랑스 화가들에게 새롭고 획기적인 것이었다. 따뜻한 갈색이나 황금색 계통의 색을 전경에 배치하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던 이전의 풍경화와는 달리, 색채를 팔레트에서 미리 섞지 않고 캔버스에 직접 바르는 방법이나, 유사색이나 보색을 통해서 직접적이면서도 선명한 효과를 내는 방법에 화가들은 매우 감동 받았다. 특히 프랑스 낭만주의의 대가 들라크루아는 컨스터블의 이러한 색의 병치 효과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컨스터블의 화풍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이들은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çois Millet)를 비롯하여 프랑스 바르비종을 중심으로 모인 화가들이었다. (이들은 이후 이 지역의 이름을 따서 '바르비종파'로 불리게 된다.) 이들은 근교의 퐁텐블로 숲에서 강렬한 풍광을 느낄 수 있는 정경을 찾았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이후에 직접 야외에서 작업을 한 것과는 달리, 당시에는 야외에서 스케치 작업을 하고, 완성 작품은 화실에서 제작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자연의 첫 인상을 화면 위에 담으려 했으며, 컨스터블이 그랬던 것처럼 유화 스케치 작업을 즐겨 함으로써 ‘완성된 작품’과 ‘스케치’와의 경계선은 점점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의 젊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나아가 인상주의의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 영국의 화가, 영국의 품에 묻히다
국내에선 큰 호응을 받지 못했던 그였지만, 그의 작업은 늘 영국을 벗어나지 않았다. 당시의 화가들이 새로운 소재와 풍경을 찾기 위해서 여행을 선호했던 것에 비하면, 그의 고집스러운 영국 풍경에 대한 애착을 새삼 느낄 수 있다. 그는 말년에 런던 근교의 햄스티드 별장에 머물며 자신의 부인과 지냈다. 이미 왕립 아카데미의 교수로서 런던에서 떨어져 지낼 수 없었던 그는 도시와 시골의 결합 지점이라고 그가 표현했던 것 처럼 시골의 풍경에 대한 그리움을 이곳에서 달래며, 자연의 변화 특히 구름의 변화를 수많은 화폭에 담았다. 이곳은 작품에 대한 영감의 원천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부인 마리아와 함께 여생을 마무리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죽기 5년 전에 그린 그림, [햄스티드에서 바라본 두 개의 무지개가 있는 런던 풍경]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내 아내의 마음에 들 작품이다 [...] 세인트폴 대성당의 돔의 모습은 마치 미켈란젤로가 극찬한 판테옹의 모습(미켈란젤로는 로마의 판테옹을 보고 "천사의 설계"라고 극찬했다고 전해진다.)처럼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그러한 것들을 하늘에 세울 것이다.”
‘[햄스티드에서 바라본 두 개의 무지개가 있는 런던 풍경] 1831’이 작품은 컨스터블의 가족이 햄스티드로 완전히 이주한 이듬해인 1828년에 사망한 아내를 추억하며 그린 그림이다. 넓은 햄스티드 초원과 왼쪽 아래로 멀리 보이는 세인트폴 대성당, 그리고 보라빛과 붉은빛이 조화를 이룬 하늘은 컨스터블의 예민한 시각적 감각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자연의 상징성과 그것의 끊임없는 변화에 열중했던 이 작품 속에서, 컨스터블은 햄스티드에 있는자신의 집에서 직접 바라본 무지개를 먼저 죽은 아내의 부활의 계시로 여겼던 듯 하다. 자신의 부인이 가장 사랑했던 풍경을 통해, 또 그가 평생을 바쳐온 풍경을 통해 그는 자신의 안식처를 찾은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존 컨스터블 [John Constable] (화가의 생애와 예술세계, 김현경)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69771&cid=58862&categoryId=58878&mobile
<존 컨스터블>
존 컨스터블 (John Constable 1776년 6월 11일~1837년 3월 31일)은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이다.
터너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풍경화가이지만 이 두 사람처럼 대조적인 사람은 없다. 터너는 매우 빨리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나, 컨스터블은 회원이 되는 데에 많은 세월을 보냈다. 터너는 빛 속에 자연을 용해시키지만 컨스터블은 생각하는 것같이 자연을 그리고, 터너는 세부를 버리지만 컨스터블은 세부에서부터 묘사를 해 나간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자연에 대한 관찰은 깊고, 더불어 근대 풍경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컨스터블은 사포크그주의 한 마을에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대기만성한 사람으로서, 개천이나 수풀이 많은 고향의 자연을 사랑하였다. 그 자연은 그에게 있어서는 깊은 진실의 존재였다. 자연 가운데에서 진실을 보고, 그는 자기의 눈을 믿었다. 그것 때문에 일반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유창한 묘사를 하지 않지만, 그 누구보다도 자연의 성격에 다가가는 강인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는 1802년에 왕립 아카데미에 입선한 이래 매년 발표를 계속하였다.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한 것은 40세 때였으며, 아내를 결핵으로 잃은 이듬해인 1829년에 겨우 아카데미 회원으로 뽑혔다. 그러나 그 후는 건강도 좋지 않고 고독한 만년을 보냈다. 컨스터블은 풍경만을 그렸는데, 프랑스의 화가보다 먼저 외광(外光) 아래서 제작한 가장 이른 한 사람이며, 영국에서는 생전에는 인식되지 못했으나, 당시의 개념과는 반대로 비근한 눈앞의 정경에도 자연의 진실을 찾아내고 있으며, 후에 프랑스의 바르비종파에도 깊은 계시를 부여했다.
●건초를 싣는 마차
1821년 작품이며,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작품은 런던에서 발표되었으나 아무런 반향도 얻지 못했고, 우연히 프랑스인이 사가지고 가서 1824년에 파리의 살롱에 출품했다. 그때 들라크루아는 대작 《키오스섬의 학살》을 출품하고 있었는데, 이 작품의 색채에 경탄하여 급히 자기 작품의 배경에 손을 대었다. 컨스터블은 각국을 돌아다니며 좋은 풍경을 찾지 않는다. 그는 한 그루의 나무나 한개의 돌에서까지 고향의 자연을 자세히 주시하고 있다. 매끄럽고 깨끗한 묘사를 많이 한 영국에서의 그는 세상 물정에 어두웠고 집요했다. 그러나 그는 꾸며진 매력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기만을 가미하지 않는 진실을 존중하고 있다. 이 화면에서는 밝은 한나절에, 얕은 물을 수레가 평화스럽게 건너고 있다. 왼편에는 전형적인 농가가 있고, 고요한 정경에, 개가 뛰어나와 움직임을 더해 주고 있다. 컨스터블은 과학자와 같은 관찰로 조석의 근소한 변이에서도 자연의 취향이 어느 정도로 변화하는지를 읽고 있다. 이 작품도 나무그늘의 습기나 근처의 물기에서, 흰벽이나 물의 일단을 밝히는 어둠을 통해 비치는 광선까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피부로 그 곳을 느끼게 하는 정밀한 묘사를 보여주고 있다.
참고 위키디피아
https://ko.wikipedia.org/wiki/%EC%A1%B4_%EC%BB%A8%EC%8A%A4%ED%84%B0%EB%B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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