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미진 작가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작가노트>
지금껏 꼬불꼬불 뒤틀린 삶으로 살았던 나 자신에게 다시 그 길을 되짚어 올라가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들은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우리가 사는 삶은 때론 도저히 풀 수 없는 매듭에 부딪쳐 끊어낼 수 밖에 없는 과정이 생기듯
그것이 과거와 현재에서 늘 같은 반복일지라도 나는 그 매듭을 풀어보고자 한다.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길에서 어린 시절의 나를 문득문득 찾게 된다.
최미진 작가님은 개인전을 4회 개최하셨어요~~~^^
개인전 전시를 한 곳은
2019년 4회 ‘도시 투영’(갤러리 인사아트. 인사동)
2018년 3회 ‘내제된 기억’ (가비앙 카페 갤러리, 수원)
2017년 2회 ‘내연 Iandscape’ (‘환’ 갤러리, 인사동)
2015년 1회 ‘기억 찾기’(카페 마마 갤러리)
에서 전시를 하셨어요~~~^^
최미진 작가님 단체전은 다수의 전시를 하셨어요`~~~^^
단체전 전시를 한 곳은
2019년 어포터블 아트페어(메트로폴리탄파빌리온, 뉴욕)
2018년 ‘코엑스 서울아트쇼’ 12/21~12/25
2017년 홍익대학교 동문그룹전 ‘Our Helerotopia’전(바이올렛 갤러리, 인사동)
2016년 미야자키현 색공 갤러리 초대전
2001~2015년 그룹 전 다수
에서 전시를 하셨어요~~~~^^
최미진 작가님 수상경력은
2016년 강남미술대전 특선 외 다수
2015년 한국수채화 공모전 특선
을 수상하셨어요~~~~^^
아래 부터는 최미진 작가님 작품들이에요~~~~~^^
내재된 기억과 도시투영 #6 | Acrylic, Mixed Media on canvas | 72.7 x 52.7cm | 2019
내재된 기억과 도시투영 #7 | Acrylic, Mixed Media on canvas | 33.5 x 45.5cm | 2019
내재된 기억과 도시투영 #8 | Acrylic, Mixed Media on canvas | 33.5 x 45.5cm | 2019
내재된 기억과 도시투영 #5 | Acrylic, Mixed Media on canvas | 117 x 72.5cm | 2019
내재된 기억과 도시투영 4 | Acrylic, Mixed Media on canvas | 224 x 162cm | 2019
내재된 기억과 도시투영 2 | Acrylic, Mixed Media on canvas | 112 x 162cm | 2019
<내가 본 전시회 느낌>
최미진 작가님 작품들을 봤을 때 몬드리안의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최미진 작가님의 작품들의 색상은 저채도로 작업을 하신 것 같아서 바라 볼 때
마음이 차분해지고 안정이 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최미진 작가님의 작품들은 도시의 건물들을 추상적으로 그리신 것 같았어요~~~~~^^
이강희 작가님의 작품을 보게 되어서 행운이였고 다음 전시회가 또 기대가 되네요.
이 작품 사진들은 작가의 촬영 허락으로 제작 하였습니다.
이 작품 사진들 안의 그림들은 작가의 허락 없이 무단 사용을 할 수 없습니다.
This picture was filmed under the artist’s agreement.
The pictures in it may not be used without the artist’s permission.
아래는 갤러리인사아트 위치에요~~~~~^^
아래는 최미진 작가님의 작품 같은 추상주의 및 몬드리안에 관련해서 찾아 보았어요~~~~~^^
추상미술[ abstract , 抽象美術 ]
일반적으로 그 표현이 물적(物的) ·객관적인 대상을 떠나, 주관적 순수 구성을 표시하는 미술.
이 사조는 이미 낭만주의의 시대에 배태(胚胎)되었으나, 예술가가 의식적 ·집중적으로 지향하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이며, 흔히 1910년의칸딘스키의 작품을 그 출발점으로 한다.
추상이라는 관념을 처음 체계화한 것은 큐비즘이다. 대상을 분석적 ·구성적 ·기하학적으로 파악한 것이 이 운동이었고, 들로네의 오르피즘(orphisme)도몬드리안의 데 스테일(De stijl)도 오장팡과 르 코르뷔지에의퓌리슴(purisme:순수주의)도 모두 큐비즘의 이념 없이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추상미술은 명백히 관념미술이며, 엄밀한 의미에서오너먼트[裝飾文樣]와도 구별되어야 한다. 추상미술에는 순기하학적 ·주지주의적경향과 낭만주의적 ·표현주의적 경향이 있다. 전자는 들로네와 몬드리안 등이고, 후자는 칸딘스키와 클레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시명명(命名)된 ‘뜨거운 추상’이 표현주의적이며 격렬한 색채의 약동을 추구하고, 한편 ‘차가운 추상’이 이지적(理知的)인 공간을 추구하는 것을 보아도, 추상미술이지성에 중점을 두는가, 감정에 중점을 두는가에 따라서 크게 나누어지는 것을 알 수있다.
추상미술은 초현실주의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초현실주의의 유력한 무기인오토마티슴(automatisme:자동기술법)은 설사 보는 사람이 거기에 갖가지기지(旣知)의 영상(映像)을 찾아냈다 하더라도 제작의 과정 그 자체는 순수한 추상적충동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효시로 하는 몇몇선구적(先驅的)인 추상적 작품을 보아도, 인간이 자연과 멀어지는 것이 얼마나어려운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추상미술 [abstract art, 抽象美術]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47572&ref=y&mobile&cid=40942&categoryId=33048
< 추상화>
1. 抽象畫
미술에서 사물을 눈에 보이는 것처럼 자연적,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점, 선, 면, 색채 등의 표현을 목표로 하는 그림, 혹은 그 기법. 보통 부드러운 선으로 이루어진 것은 뜨거운 추상, 직선으로 간단명료하게 구성된 것은 차가운 추상이라고 부른다. 앞의 예로는 칸딘스키가 있고, 뒤의 예로는 몬드리안이 있다.
원래 목적은 현실의 정치, 이념, 경제논리 등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미적인 것만을 표현하자는 열망에서 시작되었다. 그 결과 선전의 수단이 될 수 있는 인물 묘사를 배제하게 되었다. 나아가 클레멘트 그린버그 같은 이론가는 회화는 회화다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회화 이외의 요소는 전부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무슨 의미냐면, 서사는 문학에서 온 것이니 회화에서 스토리도 배제해야 하고[1], 입체감은 조각에서 온 것이니 음영같은 것도 넣지 말아야 하며, 공간감은 건축에서 온 것이니 원근법도 도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되자 점, 선, 면, 색채 같은 조형요소 그 자체의 아름다움만을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물 묘사마저 거부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어찌보면 근본주의?
이는 당시 모더니즘을 추종하던 다른 분야의 예술가, 건축가, 이론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스 반 데어 로에, 르 코르뷔지에 같은 건축가나 디자이너 모홀리 나기가 대표적. 이들은 사물에는 핵심구조가 있으며, 이 구조를 추려내는 것이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추상화한 결과물은 누구나 좋아하고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 때문인지 모더니즘은 회화, 디자인, 건축 할 것 없이 굉장히 단순한 구조를 강조하게 되었다. less is more
하지만 이렇게 모든 대상을 미분화미분화시키고 단순화시켜 버리는 방식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었는데, 오래 보면 지루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은 미술의 가능성과 다양성을 억누르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후대 예술가들은 이에 반발하는 작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
다만 추상이 탐구하고 개발한 각종 이론과 기법들은 오늘날 디자인 분야에서 유용하게 써먹고 있다. 당장 미스 반 데어 로에나 칸딘스키 등이 참여했던 디자인 학교가 바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인 바우하우스다. 애플사에서 강조하는 단순한 미니멀리즘 디자인도 어찌보면 이 영향권 하에 있는 셈.
2. 抽象化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거나 되거나 한다는 뜻이다.
2.1. abstraction
abstraction, 抽象化
전산학에서 추상화(抽象化)는 복잡한 자료, 모듈, 시스템 등으로부터 핵심적인 부분을 간추려 내는 것을 말한다.
주어진 문제나 시스템 중에서 중요하고 관계있는 부분만을 분리하여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작업. 이러한 과정은 원래 문제에서 구체적인 사항은 되도록 생략하고 핵심이 되는 원리만을 따지기 때문에 원래 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수학적인 모델이 나오기도 한다. 이 기법은 복잡한 문제나 시스템을 이해하거나 설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다.
참고: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B6%94%EC%83%81%ED%99%94
<추상 (예술)>
예술에서 추상이란 구상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어떤 대상 혹은 세계로부터 하나의 상을 추려내어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더니즘 이후 장식 중심의 미술에서 벗어나 세계를 조형적으로 정의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이것이 추상미술의 원동력이 되었다.
분류
추상은 그 형태나 의도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분리된다. 형태적으로는 바실리 칸딘스키처럼 곡선을 위주로 기하학적이지 않은 이미지들을 표현한 서정적 추상이 있는 한편, 피트 몬드리안의 경우처럼 엄밀한 구획과 기하학적 이미지를 사용하는 기하학적 추상도 있다. 의도상으로는 대상을 단순히 간략화해 표현하는 경우에서부터, 철학적 의미를 내포하여 이를 예술로 표현하려는 경우까지 다양하다.
관련 예술가
바실리 칸딘스키
피트 몬드리안
카지미르 말레비치
참고: 위키디피아
https://ko.wikipedia.org/wiki/%EC%B6%94%EC%83%81_(%EC%98%88%EC%88%A0)
< 피트 몬드리안[ Piet Mondrian]>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칸딘스키와 더불어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불린다. ‘데 스테일’ 운동을 이끌었으며, 신조형주의(Neo-Plasticism)라는 양식을 통해 자연의 재현적 요소를 제거하고 보편적 리얼리티를 구현하고자 했다. 그의 기하학적인 추상은 20세기 미술과 건축, 패션 등 예술계 전반에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다.
출생-사망: 1872.3.7 ~ 1944.2.1
본명 : 피터르 코르넬리스 몬드리안(Pieter Cornelis Mondriaan)
국적 : 네덜란드
활동분야:회화
출생지 :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주(州) 아메르스포르트
주요저서 :『신조형주의』(1920), 『조형예술과 순수 조형예술』(1937)
주요작품 :
《햇빛 속의 풍차 Windmill in Sunlight》(1908), 《회색 나무 The Gray Tree》(1912), 《노랑, 파랑, 빨강이 있는 구성 Composition with Yellow, Blue, and Red》(1937~1942), 《구성 No. 8 Composition No. 8》(1939~1942),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Broadway Boogie-Woogie》(1942~1943)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은 1872년 3월 7일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주(州) 외곽에 있는 아메르스포르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교장인 아버지 피터르 코르넬리스 몬드리안(Pieter Cornelius Mondriaan)과 어머니 요한나 크리스티안 데 콕(Johnanna Christian de Kok) 사이에서 4남1녀 중 둘째로 나서 위로는 누이가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을 이어받아 피터르 코르넬리스 몬드리안이었으나, 파리에 정착한 후 스스로 피트 몬드리안으로 이름을 바꿨다.
몬드리안은 일찍이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한 아버지와 헤이그파에 속한 풍경화가인 삼촌 프리츠 몬드리안(Fritz Mondrian)에게 회화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1892년부터 1897년까지 암스테르담의 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했는데, 이곳에서 제작한 초기 작품들은 당시 네덜란드에서 유행하던 양식을 따르는 차분한 색조의 정물과 풍경화로 지극히 평범했다. 몬드리안은 로마상(Prix de Rome)에 두 차례 도전했으나 실패하고, 교외로 내려가 혼자 머물면서 저녁 무렵의 시골 풍경을 반복적으로 그렸다.
초기 몬드리안의 작품에는 자연주의부터 상징주의,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점묘화법, 야수파, 표현주의 등 미술의 다양한 양식이 시도되었다. 그는 상징주의를 접하면서 형상의 중심을 이루는 기본 틀을 간소화시키고 분할주의나 야수주의에서 사용되는 순색 계열의 색채를 사용했다. 그는 또 엄격한 청교도 집안에서 자랐지만 동양의 신앙과 종교 철학을 연구하는 신지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 관심은 그의 작품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09년 5월 그는 신지학협회에 가입했다.
몬드리안은 1911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첫 번째 ‘현대예술그룹’ 전시회에서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y Picasso)와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의 입체파 회화를 접한 후 파리행을 결심했다. 40세 생일을 코앞에 둔 1911년 말 파리로 이주한 몬드리안은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에서 상당한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신지학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켜 나갔다. 그는 영적 본질과 세계의 물리적 외형을 결합시키고자 꽃, 나무, 인간의 형체 등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다.
몬드리안은 1912년 이래로 화면 위의 검은 선들을 그리드 형태로 그렸다. 검은 선들은 사물을 바라보는 그만의 독자적인 방식이 되었고, 그는 그물 조직과 같은 검은 선들을 통해 자연의 형태를 점차적으로 단순화시킴으로써 자신의 특징적인 스타일에 도달하게 되었다. 색채에 있어서도 회색과 갈색, 검정색으로 한정하여 색채보다 드로잉에 중점을 두었다. 이 시기에 그린 ‘나무’ 연작을 보면 나무를 사실적으로 그린 회화에서 점차 거미줄 같은 선으로 분해시켜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추상 형태로 전이해 가는 과정이 드러나고 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몬드리안은 암스테르담 근교로 돌아왔다.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면서 입체주의로부터 벗어난 그는 엄격한 추상주의로 전향하여 선과 색의 완벽한 단순화를 추구했다. 그는 신지학에서 영적인 정당성을 발견하고, 예술을 ‘추상적인 신성함’으로 규정했다. 1917년 몬드리안은 같은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테오 판 두스부르흐(Theo van Doesburg)와 함께 ‘데 스테일 De Stijl’ 그룹을 결성했으며, 잡지 『데 스테일』에 신조형주의, 즉 ‘진정한 추상주의 회화’에 대한 주요이론을 게재했다.
몬드리안은 엄격하고 기하학적이며 추상적인 회화를 추구하는 자신의 시각을 ‘신조형주의’라고 불렀다. 그는 우주적 진실을 표현하기 원했고, 이를 위해 형식을 기하학적인 형태로 환원하고 선을 수평과 수직의 축으로 환원하며 색채를 삼원색과 흰색, 검은색, 회색으로 환원하는 가장 단순한 방식을 택했다. 그에게 수직선은 생기를, 수평선은 평온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두 선들이 서로 적절한 각도에서 서로 교차하면 역동적인 평온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몬드리안은 1919년 파리로 다시 갔다. ‘데 스테일’과는 계속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대각선 요소를 도입하는 문제를 놓고 판 두스부르흐와 이견이 생기면서 점차 멀어져 바우하우스 이론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는 1920년대 초, 파리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을 신조형주의 양식에 맞추어 개조했다. 작업실 벽면은 삼원색과 흰색, 검정색, 회색의 직사각형으로 꾸미고, 모든 가구들은 흰색과 검은색으로 칠했다. 그러나 오디오만은 선명한 빨간색으로 채색했다. 그리고 꽃병에 인조 튤립을 한 송이 꽂아 놓았는데, 그 잎사귀마저도 초록색은 사용하지 않는 그의 방침에 따라 흰색으로 덧입혔다. 그는 작업실을 개인의 신화 공간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새로운 미술을 등장시킬 무대로 마련했다.
몬드리안의 회화는 수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한다. 그는 직각으로 교차되는 선과 흰색, 검정색, 회색의 무채색에 대립되는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을 농도와 명도가 일정하도록 채색함으로써 이를 가시화했다. 1921년 몬드리안은 ‘구성’이라는 연작을 발표했다. 이 연작은 절정기에 이른 그의 예술 세계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커다란 빨강과 파랑의 색면이 전해주는 힘과 색채의 상승 확장하는 움직임이 삶의 에너지를 느끼게 해준다. 색채의 움직임을 실험하면서 몬드리안은 중심이 비어 있는 구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힘의 발산을 암시하는 하얀 색면은 1921년 이후로 자주 등장하는 주제가 되었다.
1930년과 1931년에 몬드리안은 흰색 배경에 검은 선을 수직과 수평으로 그려 넣은 매우 급진적인 추상의 형태를 보여주었다. 이는 그로 하여금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해 보이는 지점에 이르게 했다. 1932년 이후 그는 반복과 연작, 모사의 원리로 돌아갔다. 그는 이전에도 대가들의 작품을 바탕으로 일련의 모사를 시작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검은 선 자체를 모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중선’이라는 특징적인 형태를 이끌어내게 되었고, 그는 1930년대 내내 이를 복잡한 선의 망조직 속에서 발전시켜 나갔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현대적이고 기계적으로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고전적인 비례와 조화가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1938년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드리우자 몬드리안은 파리를 떠나 영국으로 이주했고, 1940년 다시 뉴욕으로 갔다. 뉴욕 시기의 몬드리안은 선에 우선하는 복잡한 색채 평면을 표현함으로써 형식 실험의 진전된 단계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항상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뉴욕에서 빠르고 격렬한 비밥(bebop) 스타일의 최신 재즈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음악과 뉴욕이라는 대도시의 역동성이 몬드리안의 후기 작품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뉴욕에서 몬드리안은 이전의 작품에 등장하던 특유의 검은 선들을 삼원색의 띠 형태로 대체시킨 ‘뉴욕시티’ 연작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Broadway Boogie-Woogie》는 검은 수직선과 수평선이 사라지고 노란색 띠에 작은 색면들이 스타카토 식으로 더해진 그림으로 시각적 음악이라고 할 만큼 생생하고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또한 뉴욕을 환히 비추는 네온사인 불빛에 비친 대도시 생활을 신조형주의와 네덜란드적인 시각에서 독창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의 표현양식의 마지막 변화를 보여준다.
통제된 우연성 속에서 선과 색의 다양한 변주를 보여준 몬드리안은 1920년부터 활동 마지막 순간까지 순수추상의 원칙을 충실하게 지켰다. 그는 1944년 2월 1일 뉴욕에서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는 《승리 부기우기 Victory Boogie-Woogie》가 있다. 아마도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기원하며 이름 붙인 듯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았다. 이듬해인 1945년에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유작 회고전이 열렸다. 그의 작품은 20세기 미술과 건축, 그래픽 디자인, 패션 등 예술계 전반에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다.
주요 작품에는 《햇빛 속의 풍차 Windmill in Sunlight》(1908), 《붉은 나무 The Red Tree》(1908), 《회색 나무 The Gray Tree》(1912), 《꽃 핀 사과나무 Flowering Appletree》(1912), 《검은색과 흰색의 구성 10 Composition 10 in Black and White》(1915), 《두 선의 마름모 구성 Lozenge Composition with Two Lines》(1931), 《노랑, 파랑, 빨강이 있는 구성 Composition with Yellow, Blue, and Red》(1937~1942), 《구성 No. 8 Composition No. 8》(1939~1942), 《뉴욕 시티 I New York City I》(1942),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Broadway Boogie-Woogie》(1942~1943)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피트 몬드리안 [Piet Mondrian]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94176&mobile&cid=40942&categoryId=40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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