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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갤러리

박정연 작가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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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연 작가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at a distance>

 

이번 전시의 그림들은 거의 2018년 여름부터 가을에 그린 그림들이다.

 

개인적이고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가을이후로 올 2월 중순까지 제작의 공백기가 존재한다.

 

2월 말부터 다시 그리기 시작하여 총 6점 정도를 그렸는데 그 중 4점을 골라 총 18점으로 이번 전시를 꾸려보았다.

 

전시된 작품들은 사실 특별한 작업계획을 갖거나 특별한 서사 narrative 같은 것을 갖고 있지는 않다.

 

몇 년 전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리며 한동안 풍경을 그리다 문득 인물들을 그려보고 싶었는데 나와 나의 삶을 다루는 것은 그다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그 대신 내 주변의 지인을 포함한 타인들의 삶을 기웃거리며 작업구상을 해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수월하고 흥미로운 것이였으며 무엇보다 다작할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이미지들을 모으고 관찰하고 상상하며 작품 간의 연계성이나 어떤 공통된 주제의식 같은 것은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생각을 앞세우기보다 먼저 그림이 어떻게 나오는지가 궁금했다.

 

나는 그저 '한 개의 그림에 한명의 인물이미지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아?'라고 스스로 되뇌며 그림을 그렸었다.

 

작품을 공간에 디스플레이하고 작품들 사이를 걸으며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사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붓질을 그리는 것이다.'가 제대로 실현되었는가 생각해보면 많은 부분 실패했음이 보인다.

 

나는 아주 종종 감정 부스러기나 군더더기로 빠졌었음이 보인다.

 

어쩔 수 없이 이번 전시에는 지난여름과 가을의 작업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사실 같은 제목으로 나는 작년 봄에 개인전을 가졌었다.

 

뜻밖에 용기와 격려가 되어주신 seongaeoh님께 감사를 드린다.

 

또 흔쾌히 간접적이나마 나의 모델이 되어준 지인들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 2019. 3. 19  작업실에서






아래 부터는 박정연 작가님 작품들이에요~~~~^^

 

 

박정연 | girl in blue

 

 

 

 

 

박정연 | meringue cookies

 

 

 

 

 

박정연 | standing girl

 

 

 

 

 

 박정연 | interior with a mirror

 

 

 

 

 

박정연 | girl & pot

 

 

 

 

 

박정연 | reading

 

 

 

 

 

박정연 | girl in gold

 

 

 

 

 

 

박정연 | beachside girl

 

 

 

 

 

박정연 | farm girl

 

 

 

 

 

박정연 | portrait of H

 

 

 

 

 

박정연 | girl by the window

 

 

 

 

 

박정연 | plant & girl

 

 

 

 

 

박정연 | night espresso

 

 

 

 

 

박정연 | late night meal

 

 

 

 

 

박정연 | red cardigan

 

 

 

 

 

<내가 본 전시회 느낌>


박정연 작가님의 작품들을 처음 보았을 때 왠지 낯설지 않고 친근한 느낌이 들어요.


박정연 작가님 그림들의 소재는 박정연 작가님을 둘러싼 지인이나 친구분들을 모티브로 작품활동을 하시는 느낌이 들었어요.


작품 소재가 우리가 평소에 볼 수 있는 인물을 대상으로 작업을 하셔서 그런지 낯설지 않고 볼 때 편안한 느낌을 받았어요.


박정연 작가님 작품의 전체적인 색채들은 제가 느끼기에 밝고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받았어요. 


박정연 작가님 작품의 붓 터치들은 주변 색채들과 잘 어울러져 보였으며 마치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보는 듯한 생각이 들어요. 


박정연 작가님에 대한 프로필 및 작품활동에 대해서 소개하는 판플랫이 없어서 작가님을 좀 더 알 수 없어서 아쉬웠어요.

 

박정연 작가님의 작품을 보게 되어서 행운이였고 다음 전시회가 또 기대가 되네요.

 

 

 

 

 

작품 사진들은 작가 및 관련 관계자의 촬영 허락으로 제작 하였습니다.   
이 작품 사진들 안의 그림들은 작가 및 관련 관계자의 허락 없이 무단 사용을 할 수 없습니다. 

 

 

 

 

아래는 갤러리인사아트 위치에요~~~^^

 

 

 

 

 

 

 

 

 

 

 

 

아래는 박정연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 느껴지게 되는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해 찾아 보았어요~~~^^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 출생 - 사망 : 1853.3.30. ~ 1890.7.29.


네덜란드의 후기 인상주의 작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는 선명한 색채와 정서적인 감화로 20세기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다. 그러나 사실상 반 고흐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수식어가 되기 때문에, 이러한 수식 어구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고흐의 삶과 작품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는 넘쳐나는 현대미술을 무색케 하는 세기를 넘어선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그는 일생을 통해 빈번한 정신적 질환과 근심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37세의 나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사후에야 알려진 반 고흐는 현대미술의 토대를 형성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가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많은 작가들과는 달리, 20세 후반까지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유명한 작품들은 거의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그려진 작품들이다. 반 고흐는 900여 점의 페인팅, 1,100여 점의 드로잉과 스케치 등 총 2,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수많은 자화상을 비롯하여 풍경화, 초상화 그리고 해바라기 등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로 각종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 네덜란드에서의 유년기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남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테오도로스 반 고흐(Theodorus van Gogh)는 독일 개혁 교회의 목사였다. 빈센트는 그의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랐는데 이처럼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르는 것이 당시에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빈센트 반 고흐는 가족에게 매우 흔한 이름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1811년 라이덴 대학에서 신학 학위를 받았다. 또한 할아버지는 여섯 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 중 반 고흐가 ‘센트 삼촌’(Uncle Cent)라고 언급한 빈센트를 비롯하여 세 명이 아트 딜러였다. 이렇듯 반 고흐의 집안은 미술과 종교 두 가지의 직업으로 대를 잇고 있었다. 그의 동생 테오도로스(Theodorus)는 1857년 5월 1일에 태어났으며, 외에도 남동생 코(Cor)와 세 명의 여동생 엘리자베스(Elisabeth), 애나(Anna), 그리고 윌레미나(Willemina)가 있다.
어릴시절의 반 고흐는 진지하고 조용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 교회의 선생님 혼자 약 200여 명의 아이를 가르치는 마을 학교에 다니다가 1861년에 그와여동생은 집에서 약 32km 떨어진 초등학교에 갈 때까지 가정교사 집에서 공부를 배웠다. 반 고흐는 어른이 되었을 때조차가족 곁을 떠나는 것을 괴로워했다고 회상했다. 1866년 9월 15일 틸버그(Tilburg)의 중학교에 다니면서 꽤 성공적이었던 화가 콘스탄틴(Constantin C. Huysmans)이라는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1869년 7월에는 삼촌의 도움으로 헤이그의 아트 딜러 구필 앤 씨(Goupil & Cie)에 일자리를 얻었다. 구필은 반 고흐를 트레이닝 한 후 런던으로 보내 그곳에서 일하도록 했다. 동생 테오의 아내는 이 시기가 반 고흐에게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20세 때에 꽤 성공적으로 일해 아버지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한편, 머물고 있던 집주인의 딸 유지니 로외(Eugenie Loyer)를 좋아하여 그의 사랑을 고백하였으나, 이미 다른 남자와 약혼한 그녀는 반 고흐의 청혼을 거절하였다. 그 무렵 그는 점점 고립되어 갔고 종교에 헌신하였다. 삼촌과 파리에서 아트 딜러의 일을 계속 하게 되었으나,예술 작품이 상품으로 취급될 수 있는 것에 대해 분노한 반 고흐는4월에 직장 생활을 그만둔다.
반 고흐의 종교적 열성은 그가 화가라는 진정한 직업을 찾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가족들은 그의 신학 공부를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보내어 삼촌과 같이 지내도록 했다. 1879년 1월 반 고흐는 벨기에의 석탄 광산마을에 임시 선교활동을 떠났다. 그곳 숙소 뒤편의 임시 막사에서 설교자들과 같이 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을 같이 나누려고 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강압으로 보통 사람들이 겪는힘든 생활에 대한경험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족에게 돌아온 반 고흐는 아버지와 큰 갈등이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정신병원 수용소에 아들을 보내려고 했다. 반 고흐는 아버지와의 말다툼 이후 다시 광산 마을 돌아가 광부 찰스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주변 환경과 생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한편, 그의 동생 테오는 형에게 그림 그리는 것에 열중하라고 충고했고, 형식적인 학교 제도를 싫어하는 반 고흐를 설득해 브뤼셀에 있는 로열 아카데미 오브 아트에 다니도록 주선해주었다. 이 학교에 다니면서 반 고흐는 해부학, 모델링, 그리고 원근법 등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최소한 알아야 하는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림을 통해 하느님에게 봉사하기를 원했고, 하느님에게 인도하는 화가가 되기를 바랐다.

 


● 에텐, 드렌스 그리고 헤이그 - 처음으로 유화 그림을 그리다


1881년 4월 반 고흐는 에텐 외곽지역으로 부모들과 함께 이사하여 그곳에서 그림을 계속 그렸고, 가끔 이웃을 주제로 다루었다. 또한 여름 내내 얼마 전 과부가 된 사촌 키 보스 스트릭커(Kee Vos-Stricker)와 걷고 이야기하면서 많은 시간을 함께 하였다. 그녀는 예술가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반 고흐 어머니의 언니 요하네스 스트릭커(Johannes Stricker)의 딸이었다. 그녀는 반 고흐보다 7살이 많았고, 8살 된 아들이 있었다. 그녀에게 프러포즈했으나 그녀는 “아니, 절대로, 절대로 Nooit, nooit, nimmer”라는 말로 거절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녀를 만나기 위해 편지를 쓰고, 그녀의 아버지를 만났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는 램프의 불에 왼손을 갖다대며 다시 그녀를 만나게 해달라고 필사적으로 매달리다가 정신을 잃었다. 다음 해 1월 말, 반 고흐는 5살 된 딸을 가진 임신한 창녀 시엔(Sien)을 만나게 된다. 시엔은 7월에 아들 윌렘을 낳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반 고흐의 아버지는 아들이 그녀와 아이들을 만나는 것을 막았다.
반 고흐는 약 3주간 성병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그해 여름 처음으로 유화로 그림을 그렸다. 시엔과는 약 1년 넘게 같이 생활했지만 1883년 가을에 헤어졌다. 다른 곳으로 이사하려고 생각했으나, 시엔은 어려운 살림으로 인해 다시 창녀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시엔의 딸은 그녀의 어머니에게, 아들은 그녀의 남동생에게 각각 맡겨졌다.후에 아들 윌렘이 12살이 되어 어머니 시엔을 방문했을 때, 시엔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윌렘의 아버지는 20년 전 만났던 화가이며 이름은 반 고흐다.”

 


● 누에넨과 안트워프 - 그의 작품에관심을 보이다


누에넨에서 반 고흐는 열심히 드로잉 공부를 했다. 마을 아이들에게 돈을 주어 새 둥지를 가져오게 하여 그렸으며, 베 짜는 사람들의 스케치를 많이 했다. 1884년 가을, 반 고흐보다 10살이나 많은 이웃집 딸인 마고 베게만(Margot Begemann)은 종종 그가 그림그리는 곳을 따라다녔다. 그녀는 반 고흐를 사랑했다. 열정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보답하기 위해 반 고흐는 결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두 집안의 반대로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마고는 약물 과다복용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병원으로 옮겨져 겨우 목숨을 구하게 된다. 이 사건 이후로 1885년 3월에는 아버지가 심장 발작으로 죽었다. 그는 큰 상실감에 빠지게 된다.
그해 봄 프랑스 파리에서 그의 작품에 처음으로 관심을 보였다. 당시 첫 주요작으로 생각되는 [감자 먹는 사람들, 1885]이 완성되었고 8월에 전시되었다. 헤이그의 러스(Leurs) 화랑 유리창에 전시된 이 작품은 그림 속의농부 중 한 명에 의해 고소당했는데, 그 이후 마을의 목사는 교구민들에게 반 고흐 그림의 모델이 되는 것을 금지했다. 반 고흐는 그 시기에몇가지 정물 시리즈를 그렸다. [밀짚모자와 파이프가 있는 정물], [주전자와 신이 있는 정물]은 테크닉적으로 마스터 된 작품들로 여겨진다. 두 작품 모두 부드럽고 섬세한 붓터치와 세밀한 색으로 채색된 작품들이다. 누에넨에 머문 2년 동안 그는 엄청난 드로잉과 수채화를 완성했고, 거의 200여 점의 유화 작품을 제작하였으나 대부분이 파손되었다. 당시 그의 색조는 너무 어두워 후에 그의 최고작들과는 차이를 보인다. 반 고흐가 테오에게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는데 너무 소홀하다고 불평하였을 때, 테오는 형의 작품이 너무 어둡고 현재 유행하는 인상주의 그림이 아니라고 대답해 주었다고 한다.
1885년 11월 반 고흐는 안트워프로 옮겨 조그만 방을 빌렸다. 거의 돈이 없어 가난하게 먹었으며, 동생이 보내 준 돈은 그림 그리는 재료와 모델비로 썼다. 빵, 커피, 그리고 담배는 그에게 항상 필요한 것들이었다. 1886년 2월 고흐는 테오에게 편지 쓰기를 “1885년 5월 이후로 따뜻한 식사를 한 것은 오직 6번 뿐이었다.”고 적고 있다. 안트워프에 있는 동안 색채론을 공부하여 그림에 적용했고, 미술관의 작품 특히 루벤스의 작품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카민, 코발트, 에머랄드 그린과 같은 색조의 범위를 넓힐 수 있었다. 그는 또한 항만에서 일본의 우끼요에 판화 작품을 구입하여 작품의 배경으로 우끼요에 양식을 응용했다. 안트워프에서 반 고흐는 압생트술을 과하게 마시기 시작했다. 의사 카버낼(Cavenaile)로 부터 매독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는 아카데미 공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안트워프에 있는 아카데미 오브 파인 아트의 입학 시험에 매우 높은 성적으로 통과되었고, 1886년 1월에 페인팅과 드로잉의 입학 허가를 받았다.

 


● 파리 - 다른 작가들과의 교류


반 고흐는 1886년 3월 페르난도 코몬(Fernand Cormon)의 작업실에서 그림 그리기 위해 파리로 여행하였고, 몽마르트에 있는 테오의 아파트에서 지냈다. 6월, 그들은 좀 더 비탈진 곳의 큰 아파트로 옮겼다. 이 시기에는 테오와 편지 왕래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반 고흐가 무엇을 했는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몽마르트르의 거리와 파리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그렸다. 파리에 있는 동안 우끼요에 작품을 모아 그의 작업실 벽을 장식하였다. 그는 수백 장의 판화를 모았고, 그것은 [페레 탕기의 초상화, 1887]처럼 작품의 배경으로 그려 넣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고흐는 영국, 오스트레일리안 작가 러셀과 자주 만났고, 버나드, 안퀘틴, 고흐의 초상화를 그린 툴루즈 로트렉 등과도 자주 만났다. 그는 인상주의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1886년에 두 개의 큰 새로운 전시를 열었다. 쇠라(George Seurat), 시냑 (Paul Signac) 작품들로 구성된 전시회는 처음으로 후기 인상주의를 만들었다. 테오 또한 그의 갤러리에 모네, 시슬리, 드가, 피사로 등 몽마르트르의 인상주의 작품들을 꾸준히 모았다.
고흐는 아스니에르(Asnieres)로 거처를 옮겨 시냑과 가까워졌다. 그의 친구 버나드와 함께 고흐는 점묘주의(pointillism)의 요소를 받아들였다. 멀리서 보았을 때 캔버스에서 섞인 색조로 보여지는 작은 점들로 구성하는 기법으로 보색(complementary colors)으로 서로 강조한다. 예를 들면, 파란색과 오렌지 색은 나란히 놓았을 때 서로 강조하면서 대비를 이룬다.
1887년 11월, 테오와 반 고흐는 파리에 막 도착한 폴 고갱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그 해가 끝나갈 무렵 그는 버나드, 안퀘틴, 로트렉 등과 함께 몽마르트르의 레스토랑에서 전시회를 계획했다. 버나드와 안퀘틴은 처음으로 그들의 작품을 팔았고, 반 고흐는 곧 퐁타방 지방으로 출발하는 고갱과 서로 작품을 교환했다. 이 전시회가 개최되는 동안 예술과 작가 그리고 사회적 상황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고, 피사로와 그의 아들 루시엔, 시냑 그리고 쇠라 같은 작가들이 참여하며 전시가 확대되었다. 1888년 2월 파리의 생활에 지친 반 고흐는 이 시기 동안 그린 약 200여 점의 작품을 가지고 로트렉의 추천에 따라 남프랑스의 아를로 떠난다.

 


● 아를 - 그를 흥분시킨 활기찬 색


반 고흐는 충분한 휴식을 기대하며 아를에 왔다. 당시 그는 음주와 흡연으로 많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1888년 2월에 도착해 호텔 겸 레스토랑인 캐럴(Carrel)에 묵었다가 타운으로 거처를 옮겼다. 두 달 동안 이국적인 화가 크리스티앙(Christian Mourier-Petersen)이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아를은 이국적이면서 지저분한 곳이었다. 그의 편지에는 매춘과 음주 등으로 아를이 다른 세계로 보인다고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화가는 이곳의 풍경과 햇빛을 선택했다. 이 시기의 작품은 옐로, 울트라마린, 모브(담자색)와 같은 색으로 풍부해진다. 아를의 풍경은 그가 배운 방식대로 네덜란드 스타일로 그림 속에서 형성되었고, 들판과 길은 평평하게 표현되었으나, 색채는 더욱 강렬해졌다. 아를의 활기찬 색은 그를 흥분시켰으며 그가 새롭게 발견한 것들이 이 시기의 작품 속에서 적극 보여진다.5월에는 15프랑에 라마르틴의 노란집(Yellow House)에 방을 빌렸다. 그 방은 가구도 없이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이었으나 작업실로 쓰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었다.
반 고흐의 희망대로 고갱은 아를에서 그들의 우정을 위해 같이 지내기로 결심했다. 반 고흐는 고갱을 기다리면서 해바라기를 그렸다. 우체국장인 친구 조셉 룰랭(Joseph Loulin)의 충고에 따라 두 개의 침대를 샀고, 마침내 9월 17일에 드문드문 놓인 가구가 있는 방에서 첫 밤을 보냈다. 고갱이 아를에 머물면서 작업하고 함께 살기로 결정했을 때, 반 고흐는 노란집을 장식하는 데 매우 열성적이었다. 여러 번의 요청 끝에 드디어 10월 고갱이 아를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한 달 동안 같이 그림을 그렸다. 고갱은 반 고흐의 초상화 [해바라기의 화가]를 그렸고, 몽펠리에로 파브르 미술관에서 쿠르베, 들라크루아의 소장품을 함께 감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곧 파국에 이르렀다. 예술에 관해 격렬하게 논쟁하기 시작했고, 반 고흐는 고갱이 그를 버릴 것만 같은 공포감에 점점 휩싸였다.
1888년 12월 23일 실의의 빠진 반 고흐는 면도날같이 고갱과 대립했다. 패닉에 빠진 반 고흐는 호텔을 떠나 창녀촌으로 달아났고, 왼쪽 귀를 잘라 휴지에 감싼 다음 레이첼(Rachel)이라는 창녀에게 건네주면서 “이 오브제를 잘 보관하라”고 말했다. 고갱은 아를을 떠났고 다시는 반 고흐를 보지 않았다. 동생 테오가 고갱의 연락을 받고 병원에 입원한 형을 방문했다. 1889년 1월 다시 노란집으로 돌아왔으나 환각과 망상으로 병원과 집을 번갈아 다녀야 했다. 30명의 마을 사람들은 반 고흐를 ‘빨간머리의 정신병자’라고 부르면서 탄원서를 제출했고 경찰은 그의 집을 폐쇄했다. 화가 폴 시냑이 방문해 반 고흐가 다시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후 반 고흐는 생 레미(Saint-Remy) 지방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 생 레미 - 외부 세계와의 단절과 소용돌이 양식


1889년 5월, 반 고흐는 스스로 병원에 다녔다. 전에 수도원이었던 생 레미는 의사가 경영하는 옥수수밭에 위치해 있었다. 동생 테오는 창문에 빗장이 쳐진 방 두 개를 마련하여 나머지 하나는 작업실로 만들어 주었다. 반 고흐가 머무는 동안, 클리닉과 그곳의 정원이 작품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그는 병원 인테리어를 위해 [정신병원의 현관]과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 이 시기의 몇몇 작품은 그의 대표작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포함해 소용돌이 치는 특징을 보여준다. 반 고흐는 감시자와 함께 짧은 산책이 허용되었는데, 그것은 그에게 사이프러스와 올리브 나무의 이미지들을 떠오르게 해주었다. 그러나 외부 세계와의 제한은 그에게 그림 주제의 부족을 가져왔고, 그 결과 자신의 초기 작품의 변화를 주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들을 해석하는 작업, 예를 들면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을 분석하여 모방하거나 그와 비슷한 작업을 해나갔다. 반 고흐는 밀레의 예찬자였고 자신의 모방을 음악가가 해석하는 베토벤에 비유했다.

 


● 오베르 - 고통은 영원하다


1890년 5월, 반 고흐는 클리닉을 떠나 파리 근교의 오베르(Auvers-sur-Oise)의 닥터 가셰(Paul Gachet) 가까이 옮겼다. 이곳은 또한 동생 테오와도 가까운 거리였다. 닥터 가셰는 피사로가 반 고흐에게 추천해 주었고, 가셰는 몇몇 예술가들을 치료해준 적이 있으며 자신 또한 아마추어 작가이기도 했다. 가셰에 대한 반 고흐의 첫 인상은 “나보다 더 아픈 사람”이었다. 6월에 반 고흐는 닥터 가셰의 초상화 두 점을 유화로 완성했고 세 번째는 그의 유일한 에칭 작품으로 제작되었다. 닥터 가셰의 세 작품 모두 가셰의 멜랑콜리한 취향을 강조하고 있다. 생 레미에서의 마지막 몇 주 동안 반 고흐는 ‘북쪽의 기억들’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베르에 머물렀던 고흐의 마지막 약 70여 일 동안 [오베르의 교회, 1890]와 같이 북쪽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유화 작품 약 70여 점이 제작되었다.
병원에서 나온 반 고흐는 1889년 12월 심각한 좌절을 겪었다. 비록 그가 전 인생에 걸쳐 정신적인 병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그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이러한 고통은 더욱 심각해져갔다. 이 기간에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거나 그릴 수 없었고 이것은 능력의 절정에서 예술가의 좌절이 더해진 결과가 되었다. 반 고흐의 우울증은 점점 심해졌고 1890년 7월 27일, 37세의 나이로 들판으로 걸어가서 권총으로 그의 가슴을 겨냥했다. 간신히 남아있는 힘을 가지고 자신이 얼마나 치명적인 상태인지를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서둘러서 도착한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틀 후에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으로 “La tristesse durera toujours(고통은 영원하다, The sadness will last forever)”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참고페이지: [네이버 지식백과]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현대미술 쉽게보기,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 국립현대미술관)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68889&cid=58862&categoryId=58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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