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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갤러리

김종식 작가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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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식 작가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The Wave>

 

허블 우주망원경이 촬영한 운하와 성운이 공개될 때마다

 

이것이 궁극의 미술작품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현실과 비현실을 아우르는 환상 그 자체다.

 

땅과 바다, 하늘과 별도 아름답지만

 

시야를 넘어서 영원처럼 먼 하늘 끝 어둠속에 저런 장엄한 광경이 무한히 펼쳐있다니,

 

광활하고 황량한 우주가 화려하게 변신하여 우리 앞에 등장한 것이다.

 

나는 이 우주와 텔레파시를 교류하며 우주의 끝자락을 붙잡고 노래하고 춤을 주어야겠다.

 

내가 외계로 날아올라 허블 망원경을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멋진 우주와 나를 연결하는 방법은 없지 않다.

 

광파 전자기파 음파가 우주의 공간을 꽉 채우고 삼라만상을 이어주고 있다.

 

그렇다. 

 

저 파도를 타면 되는 것이다.

 

우주의 파도타기가 바야흐로 시작되는 것이다.

 

The Wave - Cosmic Surfing 이다.

 

 

 

 

 

김종식 작가님은 언론계에 종사하다 은퇴후 화단에 입문하셨어요.

 

2005년 이후 5차례 개인전을 열었어요.

 

여러 단체전과 해외전시에도 출품하였으며, 한국미협, 광진미협, 송파미협 회원이세요.

 

개인전

제 4회 개인전(2013년 11월 조형갤러리),

제 3회 개인전(2011년 3월 가나인사아트센터),

제2회 개인전(2007년 11월 갤러리:르씨엘)

제1회 개인전(2005년 12월 경인미술관)

 

에서 전시를 하셨어요~~~~^^

 

 

 

 

 

아래 부터는 김종식 작가님 작품들이에요~~~~^^

 

김종식 | 바람따라 I | 90.9 x 65.1cm | Oil on Canvas

 

 

 

 

 

김종식 | 바람따라 II | 90.9 x 65.1cm | Oil on Canvas

 

 

 

 

 

김종식 |  | 53 x 45cm | Oil on Canvas

 

 

 

 

 

김종식 | 섬 그림자 | 72.7 x 53cm | Oil on Canvas

 

 

 

 

 

김종식 | 황혼 | 72.7 x 53cm | Oil on Canvas

 

 

 

 

 

김종식 | 하늘과 땅 | 72.7 x 53cm | Oil on Canvas

 

 

 

 

 

김종식 | 바람 부는 날 | 116.8 x 72.7cm | Oil on Canvas

 

 

 

 

 

김종식 | 여수 앞바다 III | 72.7 x 60.6cm | Oil on Canvas

 

 

 

 

 

김종식 | 뜬구름 II | 90.9 x 65.1cm | Oil on Canvas

 

 

 

 

 

김종식 | 너에게로 I | 116.8 x 80.3cm | Oil on Canvas

 

 

 

 

 

김종식 | 구름 그림자 II | 116.8 x 80.3cm | Oil on Canvas

 

 

 

 

 

김종식 | 여수 앞바다 II | 100 x 72.7cm | Oil on Canvas

 

 

 

 

 

<내가 본 전시회 느낌>


김종식 작가님의 작품들을 처음 보았을 때 미술에 대한 비전공자라고 느끼기 못할 정도로 멋진 작품들이였어요.


김종식 작가님 작품들을 다 둘러보고 난 후에 판플렛에서 작가님의 프로필을 보고 작가님께서 은퇴하신 후 화가가 되셨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어요.


김종식 작가님 작품들의 모티브는 주로 강에 비추이는 햇살과 반사되는 풍경을 그리셨고, 유투브로 따지면 슬로우콘텐츠 같은 보고 있으면 마음의 안식과 편안함을 주는 느낌이 들었어요.


김종식 작가님 작품의 전체적인 색채들은 제가 느끼기에 밝고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받았어요. 


김종식 작가님 작품들은 마치 ‘폴세잔’의 그림 ‘졸라의 집’을 보는듯한 생각이 들어요. 


김종식 작가님의 작품을 보게 되어서 행운이였고 다음 전시회가 또 기대가 되네요.

 

 

 

 

 

작품 사진들은 작가 및 관련 관계자의 촬영 허락으로 제작 하였습니다.   
이 작품 사진들 안의 그림들은 작가 및 관련 관계자의 허락 없이 무단 사용을 할 수 없습니다. 

 

 

 

 

 

아래는 인사아트갤러리 위치에요~~^^

 

 

 

 

 

 

아래는 김종식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 느껴지게 되는 폴세잔에 대해 찾아 보았어요~~~^^

 

 

 

<폴세잔 – 글01>

 

원어명: Paul Cézanne 

출생-사망: 1839.1.19 ~ 1906.10.22 

별칭: 근대회화의 아버지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회화 

출생지: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주요작품:

《에스타크 L'Estaque(1883~1885),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The Card Players(1892~1896), 《대수욕도 Les Grandes Baigneuses(1898~1905), 《생트 빅투아르 산 Mont Sainte-Victoire(1902~1904)

 

프랑스의 화가. 사물의 본질적인 구조와 형상에 주목하여 자연의 모든 형태를 원기둥과 구, 원뿔로 해석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추상에 가까운 기하학적 형태와 견고한 색채의 결합은 고전주의 회화와 당대의 발전된 미술 사이의 연결점을 제시했으며, 피카소와 브라크 같은 입체파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어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폴 세잔(Paul Cézanne) 1839년 프랑스 남부의 엑상프로방스에서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화가가 되기를 꿈꿨으나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1859년 엑스대학교의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화가가 되려는 그의 욕망은 꺾이지 않아 1861년 법률 공부를 그만두고 파리로 향했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절친하게 지냈던 에밀 졸라(Émile Zola)의 권유로 파리의 아카데미 쉬스에서 미술 공부를 했다. 여기에서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아르망 기요맹(Armand Guillaumin) 등을 만나 후에 인상파 화가들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초기 파리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미술 공부를 시작한 아카데미 쉬스의 몇몇 학생들만큼 기교가 뛰어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곧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결국 6개월 만에 고향인 엑상프로방스로 돌아왔다.

 

세잔은 1862년 화가로서 성공할 것을 다짐하며 다시 파리로 갔다.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와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의 영향을 받은 그의 초기작은 대체로 어둡고 극적이며 거칠게 바른 물감을 특징으로 한다. 세잔은 살롱전에 출품을 준비하며 그림을 그렸지만, 매번 쓰디쓴 고배를 마셔야 했다. 1863년 살롱전에서 거절당한 화가들을 중심으로낙선전이 열렸다. 그는 이 전시회에서 마네(Edouard Manet), 피사로, 앙리 팡탱 라투르(Henri Fantin-Latour) 등과 함께 작품을 전시했다. 20년 후인 1882년에 그의 작품은 처음으로 살롱전을 통과했다.

 

1870년대 들어서면서 그의 양식은 변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세잔은 마리 오르탕스 피케(Marie-Hortense Fiquet)와 사랑에 빠졌으며,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했다. 특히 피사로에게서 인상주의 기법 및 이론을 배우고 함께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렸다. 세잔은 스스로를 진정한 인상주의 화가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1874년 제1회 인상파 전시에 참여했다. 그는 인상파에서 주목했던 광선에 관심을 가졌으나, 빛과 명암의 표면적인 분석을 넘어 기본이 되는 형태를 탐구했다. 1877년 제3회 인상파 전시를 고비로 그는 점차 인상파를 벗어나는 경향을 보였고, 구도와 형상을 단순화한 거친 터치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갔다. 이때의 작풍이 더욱 발전하여 후에 야수파와 입체파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동기가 되었다.

 

세잔은 1886년 졸라와의 오랜 우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것은 졸라의 소설 『작품』(1886) 때문인데, 세잔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실패한 천재 화가클로드 랑티에가 바로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와 완전히 결별했다. 1895년에 세잔은 화상 볼라르(Ambroise Vollard)의 기획으로 첫 개인전을 열어 좀 더 많은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말년에 그는 고향인 엑상프로방스에 돌아와서 작품에만 몰두했으며, 1900년경부터는 재능과 독특한 화풍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자연의 모든 형태는 원기둥과 구, 원뿔에서 비롯된다는 견해를 밝힐 만큼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고, 색채와 붓 터치로 입체감과 원근법을 나타내는 새로운 기법으로 회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20세기 회화의 참다운 발견자로 칭송되고 있으며, 피카소를 중심으로 하는 입체파는 세잔 예술의 직접적인 전개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을 구분하면 《목맨 사람의 집 The House of the Hanged Man at Auvers(1872~1873)이 그의 전기 작품 중에 손꼽히는 걸작이며, 《에스타크 L'Estaque(1883~1885),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The Card Players(1892~1896) 등은 원숙기의 작품이고, 《대수욕도 Les Grandes Baigneuses(1898~1905), 《생트 빅투아르산 Mont Sainte-Victoire(1902~1904) 등이 대표적인 후기 작품이다. 또한 정물 그림과 초상화에도 많은 걸작을 남겼다. 세잔은 1906년 그의 고향에서 숨을 거뒀다. 1907년 개최된 대규모 회고전은 젊은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세잔의 작품은 현대미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 밖의 주요 작품에는 《에밀 졸라에게 책을 읽어주는 폴 알렉시스 Paul Alexis reading to Emile Zola(1869~1870), 《목욕하는 사람 Bather(c. 1885), 《온실에 있는 세잔 부인 Madame Cézanne in the Greenhouse(1891~1892), 《붉은 조끼를 입은 소년 The Boy in a Red Waistcoat(1894~1895), 《석고상이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Plaster Cast(c. 1895),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Apples and Oranges(1895~1900) 등이 있다.

 

 

 

● 폴 세잔 연보

 

〮출생 1839.1.19~ 사망 1906.10.22

1839: 1 19일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 출생.

1859: 엑스대학교 법학과 입학.

1861: 법 공부를 중단하고 파리로 떠남. 친구 에밀 졸라의 권유로 파리 아카데미 쉬스에서 미술을 공부했으나 우울증 끝에 고향으로 돌아옴.

1862: 다시 파리로 떠남.

1863: 살롱전에서 거절당한 화가들과 함께 '낙선전'에 작품을 전시.

1873: 《목맨 사람의 집》 완성.

1874: 1회 인상파 전시에 참여.

1882: 처음으로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

1885: 《에스타크》 완성.

1896: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완성.

1904: 《생트 빅투아르 산》 완성.

1905: 《대수욕도》 완성.

1906: 10 22일에 사망.

 

[네이버 지식백과] 폴 세잔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13235&cid=40942&categoryId=40462

 

 

 

 

<폴세잔 – 글02>

 

폴세잔느는 프랑스의 화가.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20세기의 거장.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졸라와 사귀면서 부르봉 고교를 졸업, 엑스 법과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화가가 될 것을 열망하여 1861년 파리로 나와 아카데미 스위스에서 배웠다. 거기서 기오망(A. Guillaumin)ㆍ피사로(C. Pissarro) 등과 친교를 맺고 또 모네ㆍ드가ㆍ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과 사귀었다. 그 동안 보불(普佛) 전쟁과 그 자신의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껴 여러 번 시골에 내려가 있었다. 그의 그림은 처음 1870년경에는 어둡고 격정적인 상태를 에로틱하게 표현한 두꺼운 묘사로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주었으나 피사로의 외광(外光) 묘사에 자극을 받아 화면이 급속히 밝고, 단순화되어 갔다. 그러나 살롱에 출품한 작품들이 낙선함으로써 인상파에서 떠나 모네의 견실성을 뼈대로 한 형과 색깔의 과묵한 표현에 집중, 긴밀한 구성을 갖는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해 나갔다. 1882년에는 대망의 관전(官展)에 입선하고 1895년에는 개인전을 개최하여 점차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는 "자연은 표면보다 내부의 깊이에 있다"고 말하고 정확한 묘사를 위해 사과를 썩을 때까지 그렸다는 일화가 있다. 이처럼 그는 인상파의 사실주의를 추진시켜 단순한 시각적ㆍ현상적 사실에서 다시 근본적인 물체의 파악, 즉 자연의 형태가 숨기고 있는 내적 생명을 묘사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19세기 프랑스 회화사의 최고의 결론을 보인 화가이며 그의 예술은 20세기에 와서 더욱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어 모든 미술 사조, 특히 입체파 및 추상파의 원천을 이루었다. 드디어 그의 명성은 높아졌는데 1906 10월 어느 날 문밖에서 제작에 열중하던 그는 폭우(暴雨)를 맞고 넘어진 뒤 일주일 만에 그 고독했던 67년의 생애를 마쳤다.

 

● 작품

1864 ~ 1868년 대주연(大酒宴)

1890년 추정 붉은 조끼를 입은 소년

1891 ~ 1892년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1894년 광주리의 사과

1905년 수욕(水浴)

세인트 빅투아르산(-)

[네이버 지식백과] 세잔 [Paul Cezanne] (인명사전, 2002. 1. 10., 인명사전편찬위원회)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882179&cid=43671&categoryId=43671

 

 

 

<폴세잔 – 글03>

 

폴세잔느는 프랑스 화가. 인상주의와 플랑드르 미술에 영향을 받았다. 세잔의 정물화 가운데 가장 알려진 작품인사과와 오렌지는 무미건조한 주제를 위대한 미술로 끌어올렸다. 말년에는목욕하는 사람들처럼 몽환적으로 채색된 누드화 습작을 주로 그렸다.

 

부유한 은행가의 사생아로 태어난 폴 세잔은 어린 시절부터 화가가 되기를 꿈꿨으나, 고압적인 그의 아버지는 이러한 그의 꿈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사생아라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감이 세잔을 평생 괴롭혔던 것으로 보인다. 스물두 살에, 세잔은 파리에 6개월 동안 머물면서 미술 공부를 했고, 다른 화가들과도 교류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심한 우울증을 겪었는데, 자괴감에 빠져 자신의 그림들을 부숴버리곤 했다. 그는 고향인 엑상프로방스로 돌아갔으나, 화가로서 성공할 것을 다짐하며 1862년에 다시 파리로 향했다. 절친한 친구였던 작가 에밀 졸라와 함께 그는 정치적으로 활발히 활동했으며, 자신을 혁명론자로 선언했다.

 

이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세잔은 파리 미술계의 최상류층에 들어가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파리 살롱전에서 그의 작품들이 거절당했을 때, 세잔은 다시 한 번 우울증에 빠졌지만 이번에는 견뎌냈다. 살롱전에서 작품을 거절당한 미술가들을 위한 대안으로, 1863년에 '낙선전'이 열렸다. 세잔은 이 전시회에서 다른 '불합격자들'인 에두아르 마네, 카미유 피사로, 앙리 팡탱 라투르 등과 함께 작품을 전시했다. 20년 후인 1882년에, 그의 작품은 처음으로 살롱전에 통과되었다.

 

어둡고 우울한 색조로 그려진 세잔의 초기 작품들은 다소 밀실 공포증적인 느낌을 주며 침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1870년대 들어서면서 그의 양식은 변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세잔은 마리 오르탕스 피케와 사랑에 빠졌으며,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제하게 되었다. 특히 피사로에게서 인상주의 기법 및 이론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함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세잔은 자신을 진정한 인상주의 화가로 생각하진 않았지만, 1874년에 인상주의 화가들과 함께 전시회를 가졌다. 그는 자신의 미술이 더 '단단하고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원했다. 오랫동안 플랑드르 미술에 감명을 받았던 세잔은 플랑드르의 대가들이 사용한 것과 유사한 색조로 정물화를 그렸다. 세잔의 정물화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사과와 오렌지>(1895~1900)이다. 이 그림은 무미건조한 주제를 위대한 미술로 끌어올렸다.

 

근본으로의 회귀

1886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세잔은 재산을 상속받았다. 이 시기에 그의 작품은 중요 미술 수집가들에 의해 선호되었으나,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세잔은 자신이 실패했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했다. 세잔은 그림을 그릴 때, 장면에 감정이 이입되는 화가였기에, 그의 삶에 일어나는 변화들과 함께 그의 미술 양식도 서서히 변해갔다. 1860년대 후반에 그는 대체로 서투르고 어쩌면 화난 것처럼, 캔버스에 물감을 겹겹이 덧칠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양식은 1866년에 그의 아버지를 그린 초상화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하지만 그는 곧 <자드부팡의 길>(1871)과 같은 감각적인 그림들을 제작했다.

 

이 그림은 그의 아버지 소유의 공원을 그린 것으로 풍요롭고 색다른 해석이 특징적이다. 세잔은 풍경화나 자신의 흥미를 끄는 주제들을 반복적으로 다시 그렸다. 작품 활동의 여러 단계마다 그림이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감정들에 따라, 수많은 재창작을 시도했다. 말년에 그의 작품은 조화롭고 몽환적으로 채색된 누드화 습작들로 특징 지워지는데, 그중 <목욕하는 사람들>(1894~1905)이 가장 유명하다.

 

아름다운 우정?

세잔은 1852년에 같은 학교를 다니던 에밀 졸라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들은 곧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서로를 영웅처럼 숭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외관상 졸라는 세잔의 미술을 경외했고, 세잔은 졸라의 글을 경외했다. 졸라 역시 아마추어 화가로, 두 소년은 엑상프로방스의 시골을 산책하며 스케치하는 등 대부분의 자유 시간을 함께 보냈다. 세잔은 졸라와 함께 그림을 그리던 시절을 항상 잊지 않았다. 그의 많은 작품들 속에는 함께 그림을 그리는 인물이 나타나는데, 졸라를 모델로 한 것이다.

 

졸라의 격려 덕분에, 세잔은 엑상프로방스를 떠나 파리로 갈 수 있었다. 졸라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졸라와 그의 어머니는 파리로 이사했다. 세잔의 아버지가 완강하게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졸라는 세잔에게 함께 파리로 가서 집중적으로 그림을 그리자고 설득했다. 세잔과 졸라는 30년 이상 친구로 지냈다. 유명한 소설가로 명성을 얻고 있던 졸라는 1886년에 『걸작』을 출판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클로드 랑티에는 늘 불안해하고 성적으로 자신이 없으며, 실패한 화가로, 이후 자살을 한다. 랑티에는 졸라가 알고 있던 많은 화가들의 특성을 섞어 놓은 인물로 여겨지지만, 세잔은 랑티에가 자신을 풍자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세잔은 수십 년 동안 졸라에게 털어놓은 비밀들이 우롱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 사건으로, 한때 아름다웠던 둘의 우정은 끝나버렸다.

 

"나의 유일한 스승, 세잔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파블로 피카소

 

[네이버 지식백과] 폴 세잔 [PAUL CÉZANNE] (501 위대한 화가, 2009. 8. 20., 스티븐 파딩, 위키미디어 커먼즈)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7438&cid=44533&categoryId=44533

 

 

 

<폴세잔 – 글04>

 

프랑스의 화가. 엑상 프로방스에서 출생, 사망. 엑스 법과대학을 중퇴하고 화가가 됐다. 1860년 이후 파리와 고향에서 번갈아 생활하면서 그림을 계속하다 파리의 아카데미 주이스에서 피사로를 알고 초기 약 10년간은 어두운 바로크 풍의 주제를 힘찬 필치로 그렸다(:『흑인 사피온』, 1866, 상파울루 미술관 등). 엑스의 학우 쇠라와 친교하고 그 미술평론의 지혜를 빌렸다. 1870년대 초에 피사로에게 인상주의를 배우고 객관적 묘사로 전향, 색채도 서서히 밝기를 더했다. 수많은 『생트 빅투아르산』(1885~1906, 취리히의 뷜레 컬렉션 등)과 『트럼프를 하는 사람들』(1890~1892, 파리의 인상파 미술관 등)이 특히 유명.

 

안정된 건축적인 구도, 견고한 형태(포름), 청과 등색을 기초로 하는 명쾌한 색채 감각등이 특징적이고 또 만년의 초상화에서는 깊은 인간통찰과 철학적인 명상성을 그렸다(예 『정원사 바리에』 1906, 파리, 폴 로 장 베르 화랑). 1895년에 보탈이 연 개인전에 의하여 겨우 세평이 높아졌다. 평생동안 데생을 많이 하였고 후반에는 수채화를 즐겼고, 그 기법은 만년의 유화에도 나타난다. 에밀 베르나르 및 젊은 화가들에게 보내는 편지(존 리오르드 편)에는 회화론이 들어 있고 편지의 구절에 의해서나 작품 그 자체에 있어서나 큐비즘을 비롯한 현대의 모든 유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폴 세잔 [Paul Cézanne] (미술대사전(인명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7097&cid=42636&categoryId=42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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