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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갤러리

이정연 작가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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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연 작가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누구나 쉽지 않은 인생길을 걸어 왔으리라

나 또한 누구 못지않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다.

개인의 역사가 나라의 역사를 만든다고 했다.

해방 후 한국의 역사는 나의 역사와 얼마나 많이 닮아 있는가!

 

 


이정연 작가님은 단국대학교 에술대학 동양화과 졸업단국대학교 일반대학원 회화학과 동양화전공 석사졸업단국대학교 일반대학원 조형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셨어요~~~~^^

이정연 작가님 개인전은 2018년 갇혀진 공간(갤러리탐 문정로데오점)포함 5회, 초대전은 2018년 이정연 초대전 '물과 돌 그리고 공간'(갤러리 엠) 포함 6회부스개인전은 2017년 아트서울(한가람미술관) 포함 2회아트페어는 2018년 서울아트쇼(코엑스)를 포함 7회그룹전은 2019년 YAP테트리스아트쇼(갤러리다온) 포함 62회를 전시 하셨어요~~~~^^

 

 


아래는 이정연 작가님 작품들이에요~~~~~^^

 

 

 

 

 

<내가 본 전시회 느낌>

 

이정연 작가님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초현실주의 작가인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제가 본 이정연 작가님의 작품들은 몽환적인 느낌이면서 힘있는 느낌도 같이 받았어요~~~~~^^

 

이정연 작가님의 작품들을 보고 있자면 꿈, 희망, 기쁨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을 그리시는 것 같았어요.

 

이정연 작가님의 작품을 보게 되어서 행운이였고 다음 전시회가 또 기대가 되네요.

 

 

 

 

 

작품 사진들은 작가 및 관련 관계자의 촬영 허락으로 제작 하였습니다.   
이 작품 사진들 안의 그림들은 작가 및 관련 관계자의 허락 없이 무단 사용을 할 수 없습니다. 

 

 

 



아래는 갤러리이즈 위치에요~~~~^^

 

 

 

 

 

 

 

아래는 이정연 작가님을 작품을 봤을 때 느껴졌던 초현실주의에 대해서 찾아봤어요~~~~^^

 

 

 

<초현실주의>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또는 쉬르레알리슴(프랑스어: Surrealism) 1920년대 초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 퍼진 문예·예술사조의 하나이다. 1차 세계 대전 후, 다다이즘의 예술 형식 파괴 운동을 수정, 발전시키고 비합리적인 잠재의식과 꿈의 세계를 탐구하여 표현의 혁신을 꾀한 예술 운동이다. 인간의 무의식을 표현하는 여러 작품들을 남겼다.

 

파리 다다라는 이름처럼, 초현실주의자들은 양차대전 사이에 취리히 다다에 참여했거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다. 1924년과 1929년의 두 차례에 걸친 〈초현실주의 선언(프랑스어: Manifeste du surréalisme)〉과 그 영향을 받은 많은 운동들에서 확립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고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대다수 초현실주의자들은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후 초현실주의는 아쉴 고르키나 잭슨 폴록 같은 미국 추상표현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 특징과 대표자들

 

초현실주의자들은 "인간의 상상에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정신분석가 프로이트의 학설에서 영향을 받아, 자유로운 상상력으로서 지성을 초월한 꿈이나 무의식(unconscious; 잠재의식subconscious과 구별됨)의 세계를 해방하는 것으로서 초현실적인 미를 창조하려고 했다. 초현실주의의 가장 영향력 높은 주도자는 작가이자 미술 이론가인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 시인인 루이 아라공(Louis Aragon), 폴 엘뤼아르(Paul Éluard), 뱅자맹 페레(Benjamin Péret), 시인이자 소설가인 로베르 데스노스(Robert Desnos) 등이다. 그러나 후에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등은 브르통의 노선에 반대하며 무정형(informe; 혹은 비정형)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 외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예술가로는 장 콕토, 살바도르 달리, 호안 미로, 르네 마그리트, 막스 에른스트, 루이스 부뉴엘 등이 있다. 또 직접적으로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초현실주의자들과 가까이 지냈던 에드몽 자베스 등도 관련하여 거론된다.

 

초현실주의는 본질적으로 프랑스적이고 서유럽적인 운동이었으나, 그 영향력은 이후 아메리카나 아시아의 문화계에도 미쳤다. 가령 미국의 거트루드 스타인은 초현실주의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으며, 아르헨티나의 알도 페예그리니(Aldo Pellegrini)는 스페인어권 최초인 1926년 초현실주의 그룹을 만들고 주도하였다. 중남미의 후세대 작가 마르케스, 푸엔테스 등도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많이 차용하였다. 중남미의 초현실주의 화가로는 특히 프리다 칼로와 레메디오스 바로가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니시와키 준자부로가 일본 시단에서 초현실주의 운동을 이끌어 일본 현대시의 초석을 놓았으며, 이란의 사데크 헤다야트가 쓴 《눈먼 올빼미》는 초현실주의 문학의 걸작이자 이란 현대소설의 최고봉으로 손꼽히고 있다. 한국 문학에서 초현실주의의 대표자로는 이상이 있다.

 

● 성격

초현실주의자들 역시 다다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작품이 미술의 대상으로 숭고화되는 것에 반대하며 다양한 기법들을 사용했다. 이중 대표적인 기법으로는 콜라주(Collage), 프로타주(Frottage), 파피에 콜레(Papier Collar), 데페이즈망(depaysment), 자동기술법(automatism)등이 있다.

 

참고 위키디피아

https://ko.wikipedia.org/wiki/%EC%B4%88%ED%98%84%EC%8B%A4%EC%A3%BC%EC%9D%98

 

 

 

초현실주의(surréalisme) 1920년대

 

1. 개요

취리히에 있다 파리로 돌아온 다다이스트들은 파리 다다를 구성했다. 이들은 파리 다다란 이름보다 초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는 이들이 말 그대로 현실을 뛰어넘은 초현실(surreal)을 다루는걸 추구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초현실은 프로이트 같은 정신분석학에서 영향을 받은 무의식(unconsciousness)의 세계를 말한다.

 

대중에게는 주로 살바도르 달리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미술사나 미술 평론 쪽에서는 달리보다는 다른 예술가나 이론가들을 더 높게 평가한다. 트리스탄 차라, 앙드레 브르통, 조르주 바타이유 등이 대표적. 르네 마그리트도 달리 못지않게 유명하다. 좀 더 제대로 알아보고 싶은 위키러들이 있다면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이나 루이스 부뉴엘의 자서전 <내 마지막 한숨>, 루이 아라공의 시집들을 찾아보길 권한다.

 

2. 특징

특히 비평가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의 영향이 크다. 브르통이 사실상의 수장이었기 때문. 브르통은 1922년 무렵 루이 아라공(Louis Aragon)과 함께 다다이즘(Dadaism)에 동조해 활동하다,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고 따로 나간다. 브르통에게 있어초현실(surréalité)’이란 이성의 간섭 없이, 논리에 지배되지 않고 드러나는절대적 현실성이었다. 브르통이 1924년에 발표한 『초현실주의 선언(Manifeste du surréalisme)』에서 사전적으로 정의한초현실주의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그 뿌리가 다다이즘에 기반을 두고 있다보니 초현실주의도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이 혼재된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본래 초현실주의는 문학운동으로 출발했다. 브르통이 주요 멤버로 꼽은 이들은 문학가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가 초현실주의 하면 떠올리는 자동기술법(automatism)도 사실 문학적 방법에 가깝다. 브르통은 필리프 수포(philippe soupault)와 함께 1919년에 쓰고 1년 후 『자기장(Les champs magnétiques)』이라는 최초의 자동기술 창작물을 출간하기도 했다. 자동기술법은 브르통이 1차 세계대전 중 근무했던 병원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터득한 기법으로, 노이로제 환자들이 뱉어내는 독백과 같은 의식의 자유로운 흐름을 가능한 빠르게 받아 적는 방식이었다. 이것을 초현실주의자들은 종이 위에 글을 적거나 그림을 그리고 접어서 다음 사람에게 넘기면 앞의 글 또는 그림을 보지 못한 채 계속해서 이어 나가는 놀이를 하면서 자동기술을 적용했다. 또한 자다 깨서 몽롱한 상태로 자동기술을 하는 모습이 일종의 클리셰가 되고 무시받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이루어진 일들이다. 물론 다른 멤버들은 잠에서 갓 깬 몽롱한 상태, 잠속에서 헤메인 기억의 조각들이 다 날아가기 직전의 상태까지밖에 도달할수 없었던 반면 초현실주의그룹 안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던 로베르 데스노스(Robert Desnos)는 잠든 상태 자체로 시를 읊는 비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그 능력 덕분에 브르통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데스노스지만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정치색을 띄게 되는 데스노스는 결국 브르통에게 그룹 축출을 당했고 둘은 그 이후로 치열하게 디스전을 펼치곤 했다.

 

하지만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Pierre Reverdy)의 말을 인용하면서 초현실주의 미술이 '시적 효과'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생각했고, 자동기술법도 미술적으로 실현할 수 있을거라 여겼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브르통은 피카소(Pablo Picasso)나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만 레이(Man Ray), 앙드레 마송(André Masson), 장 아르프(Jean Arp), 후안 미로(Joan Miro), 이브 탕기(Yves Tanguy) 등을 지지했다 이들 미술가들은 주로 콜라주(collage), 프로타주(frottage)[1], 데칼코마니(décalcomanie) 등의 방식을 사용해 의식의 검열 없이 이미지를 창출하려 했다. 에른스트로 대표되는 초현실주의 콜라주의 경우 전혀 다른 곳에서 가져온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병치시킴으로써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생경한 효과를 자아냈다. 이는 피카소처럼 여전히 회화적 재현 체계 안에 머물러 있는 입체파 콜라주와는 달랐다.

 

문제는 이런 미술가의 방식이 문학가들의 방식과 통하느냐 였다. 이에 대해 브르통은 의식의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즉 무의식과 상응하면서 현실과 마주하는, 그 속에 묻혀 있던 예기치 않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문제라고 보았다. 브르통의 표현대로라면 이는 '경이(le merveilleux)'의 아름다움이다. 이는 프로이트가 언급한 운하임리히(unheimlich) 개념과도 연관이 있다.# 이 말은 보통 영어로는 언캐니(uncanny), 한국어로는 보통 '기이한 느낌', '두려운 낯섦' 정도로 번역한다.[2] 간단한 예를 들자면 기시감(déjà vu)이나 좀비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전혀 상관없는 상황이나 때, 장소에서 이전에 경험했던 것 같은 어떤 느낌을 떠올리는 묘한 상황'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관련해 브르통은 조각가 자코메티와 연관된 경험을 예로 들었다고 한다. 브르통은 자코메티에게 신데렐라의 구두를 조각해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던 적이 있는데, 자코메티는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후 둘은 함께 벼룩시장을 방문했는데, 거기서 브르통은 손잡이에 신발이 달린 숟가락을 산다. 이를 본 순간 브르통은 그 숟가락에서 신데렐라 구두를 떠올렸고, 그 형태가 중복(double)되는 것에 '경이'로운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사고방식이 대략 이런 식인 것이다. '우연'을 강조하고, 그 우연한 상황에서 경험한 언캐니한 느낌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느낌을 매개하고 표현하는 수단으로 우연히 마주친발견된 사물’(objet trouvé)을 작품으로 만들거나[3], 이미지를 중복(doubling)시키는 등의 전략을 활용했다. 위의 숟가락이나 콜라주, 데칼코마니 등의 기법을 떠올려보자. '발견한 사물'을 쓰거나, 이미지들을 쌩뚱맞게 매치시켜 '언캐니'함을 자아낸다거나, 중복된 이미지를 보여준다거나 하는 방식이 이런 배경하에서 이뤄진 것이다.

 

물론 앙드레 브르통 중심의 주류파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무의식을 바라본 초현실주의 미술가들도 있었다.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가 대표적. 광고회사를 다니다 전업작가가 된 마그리트는 처음부터 자동기술법과는 전혀 다른 세밀한 재현에 기초한 초현실주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4] 그림에는 일단은 살바도르 달리처럼 왜곡된 형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마그리트는 익숙한 일상의 이미지를 뚝 떼어내어 엉뚱한 곳에 가져다 놓고 낯설게 만드는 것을 강조했다.[5] 이렇게 해서 마그리트는 다른 초현실주의자들과 달리 전통적인 회화에 따라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초현실주의 이미지의 범주를 넘어 보다 철학적이고 인식론적인 문제에 접근했다. 대표적으로 <이미지의 반역>에서 마그리트는 파이프를 그림으로 그린다. 이를 한국 속담으로 표현한다면 '그림의 떡'에 들어맞을 것이다. 우리가 보는건 사실 그림일 뿐, 진짜 파이프가 아니기 때문. 그렇게 보면 밑에 써놓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말이 사실인 셈이다. 이와 같이 마그리트는 이미지와 대상물, 그리고 언어의 관계 체계에 대해 질문했다.

 

역시 주류파가 아니었던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는 브르통과 좀 다른 이론을 내세웠다. 바타이유가 내세운 개념은 비정형[6]이었다. 비정형 개념은 바타이유가 기존의 철학체계를 비판하고 당대의 초현실주의 예술의 미학을 정의하기 위해 제시되었던 개념이다. 바타이유는 서구의 인습적 세계관과 철학 속에서는, 인간의 지적 능력을 넘어 넘쳐흐르는 세계의 비합리적이고 성스러운 차원이 일종의 초과분처럼 간주되어 언어적 질서 외부로 삭제되어 왔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바타이유가 제시한 비정형은 수학적인 엄밀성과 언어에 의해 정의된 것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언어적 형태적 정의로부터 벗어나 끊임없이탈정의화되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한다.[7] 바타이유는 이런 비정형을 개념에 따라 초현실주의의 무의식을 성()이나 죽음과 같은 금기를 초월한 어떤 것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이런 바타이유의 이론에 따라 초현실주의 미술을 보게 되면, 초현실주의는 모호함으로 특징지어지게 된다. 예를 들면 미로의 <Relief Construction>을 보면서 '과연 저게 조각일까 회화일까?' '대체 뭘 표현하려고 한 걸까?'라고 느끼는게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딱히 정해놓고 만든게 아닌 '비정형'이니까.

 

사조를 간략화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지만, 머리 아픈 위키러들을 위해 정리하자면 끝없이 논리와 이성의 지배를 받기 좋아하는 인간 본성에 철저하게 저항한 예술사조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름다움을 정리하려고 들던 고전주의의 관습을 모조리 파괴한 인상주의와 결합하며 현대 미술까지 가장 큰 예술적-문화적 영향력을 끼치는 위대한 운동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정리가 도저히 안된다는 점에서 운동의 순수함과 정통성을 지켜내지 못한 예술사조이기도 하다. 이는 초현실주의 운동이 근원적으로 갖고 있던 모순점이기도 하였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던 초현실주의자들의 순진함은 정치까지 발을 들이며 결정적으로 무너지게 된다. 초현실주의 그룹은 당대 유럽에서 새로운 체제적 대안으로 떠오르던 공산주의를 굉장히 긍정적으로 보았고, 소련과 쿠바를 열심히 오가며 주축 인사들과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뭐 결과는 모두가 아시는대로. 그룹은 공산주의의 엄숙한 순수주의와 숙청을 흉내내다가 붕괴되어갔고 수장인 앙드레 브르통은 68혁명 때 다시 재기를 노리기도 하였으나 별 반향은 없었다.

 

3.영향

오늘날에도 초현실주의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다. 하지만 초현실주의는 이성주의나 과학주의와 타협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 재밌는 건 프로이트도 초현실주의자들을 싫어했다고 한다. 자신의 개념을 오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나 뭐라나.사실 프로이트는 자동기술법을 조금 쓰긴 했지만, 이내 이 방법에 회의감을 느끼고 상담 쪽으로 진로 방향을 튼다. 반면 연배가 아래인 자크 라캉의 경우는 초현실주의자들과 절친했다고 한다. 정신분석학은 예술계에서 만큼은 초현실주의에 끼친 영향 때문에 아직도 영향이 크다.

 

이렇게 된 데에는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현대미술의 흐름과도 연관이 깊다. 사진의 등장으로 현실의 대상을 자연스럽게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현대미술에게 무의식의 세계는 큰 메리트일 수밖에 없었던 것. 게다가 세계대전으로 논리니 이성이니 같은 것에 회의를 느낀 예술가들에게 이런 경향이 더 심해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예술 자체가 사실을 따지는 분야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예술이론의 기초도 모르는 것이다. 예술은 어디까지나 감상자에게 어떤 삘을 주는 게 목적이다. 이미 수백 년 전에 임마누엘 칸트는 '취향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유일하게 공통된 건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를 좋아하는 취향을 하나씩쯤은 가지고 있다.'라는 취지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공통된 사실이나 진리 도출이 불가능한 분야가 예술이다. 단지 좀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을 뿐이다.

 

현대 영화사에서도 빼놓을수 없는 사조기도 하다. 루이스 부뉘엘은 초현실주의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무의식와 유머를 영화에 끌어들인 것으로 유명하다. 알프레드 히치콕 역시 초현실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고, 아예 살바도르 달리를 초청해 같이 작업하기도 했다. 자유연상적인 영화 기법은 대체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참고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B4%88%ED%98%84%EC%8B%A4%EC%A3%BC%EC%9D%98

 

 

 

<초현실주의 작가 -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í] : 20세기 초현실주의 >

 

1989.1.23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초현실주의 화가 세상을 떠나다

화가 달리는 한 시절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의 독창성과 상상력은 그림을 통해 이 세상을 다시 보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가 1 23일 여든 다섯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피카소처럼 살아서 최고의 그림 값을 받았던 그는 세상을 잘 살았다. 생활의 유복함을 따져본다면, 그는 고흐의 반대편에 있었다고 할까?

 

● 광기로 가득했던 20세기 대표 화가, 스스로를 천재라고 부르다.

그의 시신은 자신의 미술관인 피게라스 극장 미술관에 안치되었다. 달리는 자신이 태아였을 때를 기억한다고 큰소리친다. 풍부한 색감의 언어로 자궁 속의 세상을 묘사한다. 그런데 그런 태도가 역겨운 게 아니라, 달리라서 인지 초현실적인 상상력의 문장으로 읽힌다. 그의 자서전에 나타난 이기적이고 교만한 태도는 그가 천재여서 읽힌다. 그의 그림을 보지 않았더라면, 뭐 이런 미친 인간이 있나, 싶어 책을 내던졌을 것이다. 달리는 자신의 호적 신고를 하던 날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모든 교회의 종들을 울릴지어다! 허리를 구부리고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이여, 지중해의 북풍에 뒤틀린 올리브나무처럼 굽은 허리를 바로 세울지어다! 그리고 경건한 명상의 자세로 못박힌 손바닥에 뺨을 기댈지어다. 보라 살바도르 달리가 태어났도다.” 그리고 이런 글도 있다. “불행하도다. 그대들 모두여!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둘지어다! 내가 죽는 날은 사정이 다를 것이니!” 화가로서 달리는 잘 훈련된 지성과 놀라운 독창성, 기괴하고 파격적인 옷차림 등으로 유명하다. 자서전을 비롯한 책들도 또한 그의 그림처럼 놀라운 작품이었다. 그래 달리여, 당신은 천재이다. 내 인정한다. 잘 가라, 달리여. 부디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다시 돌아간 오늘을 슬프지 않게 하라. 당신의 영혼은 이미 그림 그 자체가 되었으니까.

 

"저 은행 창구 직원이 내가 준 현금을 먹어 치울 게 분명해"

“사실 나는 일생 동안정상성이라는 것에 익숙해지는 게 몹시 어려웠다. 내가 접하는 인간들,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정상적인 그 무엇이 내게는 혼란스러웠다. 내 생각에는 생길 수도 있는 일들이 절대로 생기지 않는 것도 의문이었다. 나는 인간이 언제나 가장 엄격한 순응주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인간 존재가 개인화되지 않는 정도가 너무나 심한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은행에 간 달리는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직원이 수표를 먹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금을 가져오기 전에는 창구의 직원에게 수표를 주지 않으려고 한다. 옆에 있던 부인 갈라가 달리를 설득했다. 직원이 수표를 먹지 않을 것이며, 먹는다고 해도 현금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달리는 그제서야 직원에게 수표를 내민다. 그는 그런 일을 나중에 글로 쓰기도 했다.

 

그는 정상인이 아닌 장애인이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현실 부적응 장애는 예술가로서는 축복받은 일이기도 했다. 고전적인 예인들은 연주와 노래를 위해 일부러 눈과 귀를 멀게도 했다. 하지만 달리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장애를 자랑했다. 그는 완벽하게 일반인들과는 다른 천재임을 태아적부터 인식했다.

 

"이 맛있는 걸 먹는 게 금지된죄 라면 얼마나 더 감미로울까!"

달리는 초현실주의 화가이다. 그는 앙드레 부르통과의 불화로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제명당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초현실주의 자체이니까 아무도 나를 쫓아내지 못한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말이다. 그의 초현실주의는 자신이 이미 천재로 태어났다는 자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도무지 현실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누가 뭐래도 초현실적일 수밖에.

 

달리는 1904 5 11일 스페인 카탈루냐 동북부의 소도시 피게라스에서 태어났다. 달리의 이름 살바도르는 죽은 형의 이름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달리는 고집불통에다 안하무인이었다. 그는 금기시된 것들에 대한 도전으로 유년시절을 보낸다. 스탕달은 이탈리아의 한 왕녀가 더운 여름 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이렇게 탄식했다고 그의 일기에 썼다. “이 맛있는 걸 먹는 게 금지된 죄라면 얼마나 더 감미로울까!” 달리는 이 말을 자서전 초반에 유년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인용해 놓았다. 그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는 감미로운 세상을 위해, 금기를 향해 스페인 투우사처럼 돌진한다. 6살 때의 꿈은 요리사, 7살 때는 나폴레옹이 되기를 꿈꾸었던 달리는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이라는 대 참사 속에서도 달리 방식대로 살아나갔다. 그의 독창성은 그의 유년기 태동된, 트리스탕 라라를 필두로 한 다다이즘 운동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즉 그의 탄생과 함께 자연스럽게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도 같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17세가 되던 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깊은 상처를 안은 채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인류 역사뿐 아니라 인간의 삶에도 어떤 기운이 한데 모이는 시기가 있다. 위대한 사람이 한 그룹을 이룰 때도 있다. 이 시절에 달리는 다른 천재들을 만나고 사랑하게 된다. 학창시절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낸 시인로르카와 영화감독 부뉴엘을 만났다. 로르카는 이기주의의 화신인 달리가 천재라고 인정하는 스페인의 시인이었다. 훗날 스페인 내전의 희생양으로 로르카가 어처구니없이 그라나다에서 처형당하자 달리는 그 때의 심경을 일기에 이렇게 썼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과 심지어는 프랑코를 추종하는 파시스트들까지도 로르카의 죽음을 이용하여 수치스러운 선전선동을 일삼았다. 오늘날 로르카를 보라! 어떻게 되었나? 그는 정치적 영웅이 되어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 살바도르 달리, 한 때 그의 절친한 지기였던 나는 이제 신과 역사 앞에서 이렇게 선언하는 바이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그는 백 퍼센트 순수한 시인이었으며 내가 만났던 사람 중 가장 완벽하게 비정치적인 사람이었음을 맹세한다라고 말이다. 그는 단지, 개인적인 타인이 결코 범해서는 안 될 인간의 권리를 박탈당한 시대의 가련한 희생양이었다.”

 

"저게 성모 마리아 상이라고요? 제 눈에는 저울처럼 보이는데요"

20대 초반 마드리드 왕립미술학교의 학생 시절, 성모 마리아의 고딕 조각을 보고눈으로 보는그대로 정확하게 그리라는 교수의 과제에 광고지에서 본 저울을 그려낸다.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자기 자신이 세기의 천재라고 확신하고 있는 달리는 고딕 조각의 성모 마리아를 저울로 그렸고, 그 그림을 보고 아연실색하고 있는 교수에게선생님께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 고딕 성모 상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울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매우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달리는 아버지의 돈을 펑펑 쓰면서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보고, 그리고, 조작했다. 그는 미술아카데미에서의 파행적인 행동으로 정학처분, 반정부 활동 혐의로 감옥생활도 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지내다가 결국 퇴학을 당하게 된다. 미술사 과목의 답안 제출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서전에심사위원보다 내가 더 완벽하게 답안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제출을 거부했다고 써놓았다.

 

●두통에 시달리다가,흐늘거리는 두 개의 시계를 난데 없이 보게 되다

달리에게 파리는 고향 다음으로 각별한 장소이다. 20세기 초 파리는 세계 예술가들의 둥지이자, 무덤이기도 했다. 그는 처음 파리에 가서 피카소를 만난다. 스페인 출신 두 거장의 만남이었다. 이미 대가인 피카소와 한참 혈기방장한 달리는 서로를 알아보지만, 서로 다른 세계관으로 평행선을 그으면서 살게 된다. 피카소 외에도 파리에서 만난 유명 인사들과 친숙하게 지냈다. 그 중에는 디자이너 코코 샤넬, 막스 에른스트, 르네 마그리트, 폴 엘뤼아르, 앙드레 부르통 등과 같은 초현실주의 그룹들은 그의 활화산과 같이 타오르는 예술가로서의 삶에 기름을 부어주었다.

 

우리가 매우 익숙하게 알고 있는 그의 작품 <기억의 연속성>은 흐늘거리는 시계의 이미지로 매우 강력하게 남아 있다. 그 그림은 달리가 두통에 시달려 친구들과 같이 극장에 가기로 한 약속 장소에 갈라만 보내고 집에 혼자 남아 우연히 그린 것이다.

 

당시 작업 중이던 풍경화에 그려 넣을 오브제가 떠오르지 않아 불을 끄고 작업실을 나가려는 순간, 두 개의 흐늘거리는 시계가보였다.’ 그 중 하나는 올리브 나무 가지에 척하니 걸쳐져 있었다. 이 작품을 순식간에 완성한 뒤 극장에서 돌아온 갈라에게 공개했다. 눈을 감게 하고 그림 앞에 앉게 한 뒤 하나, , 셋을 세고는 눈을 뜨게 했다. 그림을 본 갈라는 자신이 어떤 공연을 보고 왔는지 완전히 잊을 정도로 감탄했다. 그림이 그녀의 조금 전 기억을 모두 앗아간 것이다. 이 즈음 달리는 파리뿐 아니라 미국과 런던에서도 인정받는 세계적인 화가가 되고 있었다. 그의 재능은 영화, 퍼포먼스, 강연, 저술은 물론 뉴욕의 백화점 매장 전시 등을 통하여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게 나타난다. 그는 자서전을 1941 7 30일에 탈고한다. 그의 36년의 인생을 정리한 것이다. 그날 그는 알몸으로 있었다고 쓴다.

 

●달리 인생의 유일한 여인, 갈라를 유아적이고 맹목적으로 사랑하다

그의 화려한 인생에는 그에 걸맞게 화려한 인물들(프로이트, 피카소, 엘뤼아르, 로르카, 천재적인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등장한다. 그의 화폭에는 이러한 인간들의 오브제가 몽땅 녹아 들어가 흐늘거리고 있다. 마치 난로 옆에 놓인 치즈처럼 달리 옆에 가면 흐늘거리면서 오브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 유일한 단 한 명의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는 갈라다. 단테에게 베아트리체가 있었다면, 달리에게는 갈라가 있었다. 멀리서 사랑을 바라보기만 하던 단테와 다르게, 달리는 당장에 갈라와 같이 산다. 갈라는 달리의 열쇠이자, 하늘이자, 땅이었다.

 

둘이 만났을 때 이미 그녀는 시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이었고, 10년 연상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둘은 바로 사랑에 빠지고 동거에 들어간다(둘은 만난 지 수십 년 후 엘뤼아르가 사망하자, 교회에서 인정하는 부부가 되었다). 갈라는 달리라는 남자를 만나 그야말로 허공에 붕붕 떠다니는 천재를 지상의 천재로 만드는데 온 인생을 바친다. 갈라를 만나기 전의 달리와 그녀를 만난 후의 달리는 달랐다. 달리의 사랑은 유아적이고 맹목적이었다. 갈라가 병원에 입원하자 그녀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의사의 가운에 매달려 울부짖어 초현실주의 그룹 전체를 놀라게 했다. 갈라가 병상에서 일어나자 달리는 이런 생각을 했다. “결국 내가 당신을 죽일 수도 있겠군!”

 

"광기 아니면 삶! 광인과 나의 차이는 내가 광인이 아니라는 점"

어느 날, 달리는 독일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시인 에드워드 제임스와 함께 자신이 존경하는 프로이트를 방문하러 갔다. 달리는 편집증에 관해 발표한 자신의 글을 노대가에게 봐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무심하게 대했다. 달리가 물고 늘어지자 프로이트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완벽한 스페인 사람의 원형은 내 처음 봤소. 이 광적인 집요함이라니요!”

 

그는 초현실주의 화가이지만, 어느 순간 그것마저도 넘어서 버렸다. 초현실을 넘어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그곳에는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가 무너진다. 달리는 말한다. ‘초현실주의자로서 나의 성공은 내가 초현실주의를 현실에 융합시키지 않는 한 아무 가치가 없을 것이다. 나의 상상력은 고전주의로 돌아가야만 했다. 완성해야 할 작품이 하나 남아 있었고, 그 작품을 완성하려면 내 여생을 다 바쳐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이러한 궁금증을 품고 있는 독자를 위해 달리는 이렇게 말했다.“광기 아니면 삶! 나는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늙어 죽을 때까지 생생히 살아 있을 나와 광인의 차이는 내가 광인이 아니라는 점이라고.”

 

달리를 남겨두고 89세를 일기로 갈라가 세상을 떠난다. 달리는 갈라를, 그녀에게 선물한 푸볼 성에 안치시키고 매우 불안한 만년을 보내게 된다. 파킨슨병과 자살 기도, 침실 화재로 인한 수술을 받으면서 힘든 노년을 보낸 그는 결국 폐렴과 심장병 합병증으로 응급실을 오가다 84세에 갈라의 곁으로 돌아갔다. 달리는 죽음의 순간에 지구를 작은 공으로 만들어 발로 뻥 차버리지 않았을까? 먼 우주로 날아가는 작은 공이 된 지구는 달리라는 인간의 광기 어린 눈동자일 수도 있으리라.

 

참고 네이버캐스트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66892&cid=59014&categoryId=59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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