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민 작가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작가노트>
지금까지 나의 작업에는 항상 반영상이 존재해왔다.
처음에는 단순히 유리, 거울, 고여 있는 빗물, 수면에 그려진 대상의 단순한 형상으로서 존재해왔다.
또한 진실 거짓, 실패와 성공 등과 같이 삶 속에서 이분법적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 졌을 때 심리적 현상들을 반영해왔는데 이를 통해 인간의 욕망에 담긴 양면성을 표현한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늘 작가로서 고민하게 되는 새로움, 변화됨과 같은 압박감에서 벗어나고자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탈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주사위, 즉 나 자신의 모습에서 변화를 꾀하였다.
단순히 반영사이의 형상이 아니라 본질의 양면성, 형의 분리와 결합을 반복시킴으로써 동일한 형태의 대상이 이와 같은 과정을 지나 전혀 다르고 새로운 형이상학적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이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판타지적 상상을 자극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발현된 이미지는 보는 이의 경험적 범위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을 일으키며 변화시켜 보여지게 된다는 것이다.
"새로움"이란 결국 단순한 교체가 아니라 본질에서의 세분화와 시점의 전환과 변화로도 생성이 가능한 것이다.
결국 판타지란 먼 미지의 세상이 아닌 나의 마음과 경험 속에 있고 스스로 정해놓은 보이지 않는 경계의 선을 넘을 때 비로소 새로운 세상의 문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데 그곳이야말로 나만의 판타지 세상인 것이다.
그리고 작가인 나는 그것을 단지, 그리고 꿈을 꾸면 되는 것이다.
늘 과거의 주사위는 현실을 부정하고 탈출하고픈 것과 동시에 닿고 싶은 이상을 향한 양면의 탈을 쓴 욕망에 가득 찬 나 자신이었다.
이것을 분해, 재결합, 삭제해 가면서 정육면체란 가장 완벽하고 고집스러운 불변의 주사위가 아니라 새로운 판타지의 꿈을 품고 있는 주사위로 탄생하는 것이다.
실제 현실 속에서도 나 자신을 그렇게 스스로 채찍질하고 변화하려 꾀한다면 작품도 작가의 삶도 한 인간으로서의 인생에 새로운 판타지 세상이 열릴 것이다.
그 출발은 바로 내 마음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경계를 한 걸음만 넘어 보는 데에서 시작될 것이다.
- 두민 작가노트 중에서
두민 작가님은 추계예술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하셨어요~~~^^
개인전은 3회 개최 하셨어요~~~^^
개인전을 개최한 곳은
2013년 Enjoyable 가나아트 부산(부산)
2011년 Fortune Holic 가나컨템포러리(서울)
2009년 Fortune-Janus r가나아트강남(서울)
에서 전시를 하셨어요
참여하신 주요 단체전으로는
2012년 화랑미술제(코엑스, 서울)
2012년 작은 보물찾기(갤러이이즈, 서울)
2012년 플라스틱데이즈(포항시립미술관, 포항)
2012년 K-아트스타 미의제전(인사아트센터, 서울)
2012년 힐링캠프(가나아트센터, 서울)
2012년 영나구상의 진수전(포스코갤러리, 포항)
2012년 아트아시아(코엑스홀, 서울)
2011년 아트포르테-“화음”전 (가나아트센터, 서울)
2011년 픽션&논픽션(안터알리아, 서울)
2011년 MY OASIS 치명적 아름다움(대구백화점갤러리, 대구)
2011년 한국현대미술제특별전(예술의전당, 서울)
2011년 LOVE SHARE PLEASURE(CNB갤러리, 서울)
2011년 작은것의 미학1F전(Artuser Gallery, 서울)
2010년 물아, 심미전(가나아트센터, 서울)
2011년 My private Collection(가나아트센터, 서울)
2011년 ARCO madrid ART FAIR 2010 (IFEAM 스페인)
2011년 My private Collection(가나아트부산, 부산)
2011년 홍콩 국제아트페어(홍콩컨벤션전시센터, 홍콩)
2011년 아트타이페이(월드트레이드센터, 대만)
2011년 한국국제아트페어(코엑스, 서울)
2011년 한국현대미술제특별전(예술의전당, 서울)
2011년 한국화랑미술제(벡스코, 부산)
2011년 호텔아트페어(신라호텔, 서울)
2009년 한국국제아트페어(코엑스대서양홀, 서울)
2008년 한국현대미술제(예술의전당, 서울)
2008년 가나아트 개관 25주년 기념전 더브릿지(가나아트부산, 부산)
2008년 서울 오픈 아트페어(코엑스 인도양홀, 서울)
2008년 갤러리 메이준 개관 초대전(갤러리 메이준, 서울)
2008년 미나앙상블전(박영덕화랑, 서울)
2008년 KAMI’S Choice: The soul of Korea contemporary Art(인사아트센터, 서울)
2008년 My private Colllection(가나아트센터, 서울)
에 참여하셨어요~~~~^^
주요 수상경력으로는
2005년 단원미술대전 입선(단원미술관, 안산)
2003년 중앙미술대전 입선(서울역사박물관, 서울)
2003년 뉴-프론티어공모전 입선(단원미술관, 안산)
2002년 전국대학미술대전 특선(청주대미술관, 청주)
에서 수상을 하셨어요~~~~~^^
아래 부터는 두민 작가님 작품들이에요~~~~^^
<내가 본 전시회 느낌>
“내가 꿈을 꾸거나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인가?”
두민 작가님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몽환적인 느낌을 받았어요.
한국의 초현실주의 작가 샤갈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두민 작가님의 작품들은 대부분 검정색을 바탕으로 원색적 색상의 물체를 창조적으로 잘 표현하
셔서 꿈속의 세계를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두민 작가님의 작품을 보게 되어서 행운이였고 다음 전시회가 또 기대가 되네요.
작품 사진들은 작가 및 관련 관계자의 촬영 허락으로 제작 하였습니다.
이 작품 사진들 안의 그림들은 작가 및 관련 관계자의 허락 없이 무단 사용을 할 수 없습니다.
아래는 인사아트갤러리 위치에요~~~~~^^
아래는 두민 작가님의 작품 같은 초현실주의 관련해서 찾아 보았어요~~~~~^^
<초현실주의>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또는 쉬르레알리슴(프랑스어: Surrealism)은 1920년대 초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 퍼진 문예·예술사조의 하나이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다다이즘의 예술 형식 파괴 운동을 수정, 발전시키고 비합리적인 잠재의식과 꿈의 세계를 탐구하여 표현의 혁신을 꾀한 예술 운동이다. 인간의 무의식을 표현하는 여러 작품들을 남겼다.
파리 다다라는 이름처럼, 초현실주의자들은 양차대전 사이에 취리히 다다에 참여했거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다. 1924년과 1929년의 두 차례에 걸친 〈초현실주의 선언(프랑스어: Manifeste du surréalisme)〉과 그 영향을 받은 많은 운동들에서 확립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고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대다수 초현실주의자들은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후 초현실주의는 아쉴 고르키나 잭슨 폴록 같은 미국 추상표현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징과 대표자들
초현실주의자들은 "인간의 상상에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정신분석가 프로이트의 학설에서 영향을 받아, 자유로운 상상력으로서 지성을 초월한 꿈이나 무의식(unconscious; 잠재의식subconscious과 구별됨)의 세계를 해방하는 것으로서 초현실적인 미를 창조하려고 했다. 초현실주의의 가장 영향력 높은 주도자는 작가이자 미술 이론가인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 시인인 루이 아라공(Louis Aragon), 폴 엘뤼아르(Paul Éluard), 뱅자맹 페레(Benjamin Péret), 시인이자 소설가인 로베르 데스노스(Robert Desnos) 등이다. 그러나 후에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등은 브르통의 노선에 반대하며 무정형(informe; 혹은 비정형)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 외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예술가로는 장 콕토, 살바도르 달리, 호안 미로, 르네 마그리트, 막스 에른스트, 루이스 부뉴엘 등이 있다. 또 직접적으로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초현실주의자들과 가까이 지냈던 에드몽 자베스 등도 관련하여 거론된다.
초현실주의는 본질적으로 프랑스적이고 서유럽적인 운동이었으나, 그 영향력은 이후 아메리카나 아시아의 문화계에도 미쳤다. 가령 미국의 거트루드 스타인은 초현실주의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으며, 아르헨티나의 알도 페예그리니(Aldo Pellegrini)는 스페인어권 최초인 1926년 초현실주의 그룹을 만들고 주도하였다. 중남미의 후세대 작가 마르케스, 푸엔테스 등도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많이 차용하였다. 중남미의 초현실주의 화가로는 특히 프리다 칼로와 레메디오스 바로가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니시와키 준자부로가 일본 시단에서 초현실주의 운동을 이끌어 일본 현대시의 초석을 놓았으며, 이란의 사데크 헤다야트가 쓴 《눈먼 올빼미》는 초현실주의 문학의 걸작이자 이란 현대소설의 최고봉으로 손꼽히고 있다. 한국 문학에서 초현실주의의 대표자로는 이상이 있다.
성격
초현실주의자들 역시 다다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작품이 미술의 대상으로 숭고화되는 것에 반대하며 다양한 기법들을 사용했다. 이중 대표적인 기법으로는 콜라주(Collage), 프로타주(Frottage), 파피에 콜레(Papier Collar), 데페이즈망(depaysment), 자동기술법(automatism)등이 있다.
참고 위키디피아
https://ko.wikipedia.org/wiki/%EC%B4%88%ED%98%84%EC%8B%A4%EC%A3%BC%EC%9D%98
<초현실주의>
취리히에 있다 파리로 돌아온 다다이스트들은 파리 다다를 구성했다. 이들은 파리 다다란 이름보다 초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는 이들이 말 그대로 현실을 뛰어넘은 초현실(surreal)을 다루는걸 추구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초현실은 프로이트 같은 정신분석학에서 영향을 받은 무의식(unconsciousness)의 세계를 말한다.
대중에게는 주로 살바도르 달리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미술사나 미술 평론 쪽에서는 달리보다는 다른 예술가나 이론가들을 더 높게 평가한다. 트리스탄 차라, 앙드레 브르통, 조르주 바타이유 등이 대표적. 르네 마그리트도 달리 못지않게 유명하다. 좀 더 제대로 알아보고 싶은 위키러들이 있다면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이나 루이스 부뉴엘의 자서전 <내 마지막 한숨>, 루이 아라공의 시집들을 찾아보길 권한다.
2. 특징
특히 비평가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의 영향이 크다. 브르통이 사실상의 수장이었기 때문. 브르통은 1922년 무렵 루이 아라공(Louis Aragon)과 함께 다다이즘(Dadaism)에 동조해 활동하다,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고 따로 나간다. 브르통에게 있어 ‘초현실(surréalité)’이란 이성의 간섭 없이, 논리에 지배되지 않고 드러나는 ‘절대적 현실성’이었다. 브르통이 1924년에 발표한 『초현실주의 선언(Manifeste du surréalisme)』에서 사전적으로 정의한 ‘초현실주의’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초현실주의. 남성명사. 순수한 심리적 자동기술(automatisme)로서, 이를 통해 말로든 글로든, 그 외 어떤 방식으로든, 사유의 실제 작용을 표현하는 것. 이성에 의한 모든 통제가 부재하는, 미학적이고 도덕적인 모든 선입견에서 벗어난, 사유의 받아쓰기.
그 뿌리가 다다이즘에 기반을 두고 있다보니 초현실주의도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이 혼재된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본래 초현실주의는 문학운동으로 출발했다. 브르통이 주요 멤버로 꼽은 이들은 문학가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가 초현실주의 하면 떠올리는 자동기술법(automatism)도 사실 문학적 방법에 가깝다. 브르통은 필리프 수포(philippe soupault)와 함께 1919년에 쓰고 1년 후 『자기장(Les champs magnétiques)』이라는 최초의 자동기술 창작물을 출간하기도 했다. 자동기술법은 브르통이 1차 세계대전 중 근무했던 병원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터득한 기법으로, 노이로제 환자들이 뱉어내는 독백과 같은 의식의 자유로운 흐름을 가능한 빠르게 받아 적는 방식이었다. 이것을 초현실주의자들은 종이 위에 글을 적거나 그림을 그리고 접어서 다음 사람에게 넘기면 앞의 글 또는 그림을 보지 못한 채 계속해서 이어 나가는 놀이를 하면서 자동기술을 적용했다. 또한 자다 깨서 몽롱한 상태로 자동기술을 하는 모습이 일종의 클리셰가 되고 무시받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이루어진 일들이다. 물론 다른 멤버들은 잠에서 갓 깬 몽롱한 상태, 잠속에서 헤메인 기억의 조각들이 다 날아가기 직전의 상태까지밖에 도달할수 없었던 반면 초현실주의그룹 안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던 로베르 데스노스(Robert Desnos)는 잠든 상태 자체로 시를 읊는 비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그 능력 덕분에 브르통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데스노스지만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정치색을 띄게 되는 데스노스는 결국 브르통에게 그룹 축출을 당했고 둘은 그 이후로 치열하게 디스전을 펼치곤 했다.
하지만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Pierre Reverdy)의 말을 인용하면서 초현실주의 미술이 '시적 효과'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생각했고, 자동기술법도 미술적으로 실현할 수 있을거라 여겼다.
이미지는 정신의 순수한 창조물이다…… 병치된 두 현실의 관계가 멀고도 정확할수록, 이미지는 보다 강력해질 것이며- 정서적으로 더 강한 힘과 시적 현실성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브르통은 피카소(Pablo Picasso)나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만 레이(Man Ray), 앙드레 마송(André Masson), 장 아르프(Jean Arp), 후안 미로(Joan Miro), 이브 탕기(Yves Tanguy) 등을 지지했다 이들 미술가들은 주로 콜라주(collage), 프로타주(frottage)[1], 데칼코마니(décalcomanie) 등의 방식을 사용해 의식의 검열 없이 이미지를 창출하려 했다. 에른스트로 대표되는 초현실주의 콜라주의 경우 전혀 다른 곳에서 가져온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병치시킴으로써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생경한 효과를 자아냈다. 이는 피카소처럼 여전히 회화적 재현 체계 안에 머물러 있는 입체파 콜라주와는 달랐다.
문제는 이런 미술가의 방식이 문학가들의 방식과 통하느냐 였다. 이에 대해 브르통은 의식의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즉 무의식과 상응하면서 현실과 마주하는, 그 속에 묻혀 있던 예기치 않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문제라고 보았다. 브르통의 표현대로라면 이는 '경이(le merveilleux)'의 아름다움이다. 이는 프로이트가 언급한 운하임리히(unheimlich) 개념과도 연관이 있다.# 이 말은 보통 영어로는 언캐니(uncanny), 한국어로는 보통 '기이한 느낌', '두려운 낯섦' 정도로 번역한다.[2] 간단한 예를 들자면 기시감(déjà vu)이나 좀비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전혀 상관없는 상황이나 때, 장소에서 이전에 경험했던 것 같은 어떤 느낌을 떠올리는 묘한 상황'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관련해 브르통은 조각가 자코메티와 연관된 경험을 예로 들었다고 한다. 브르통은 자코메티에게 신데렐라의 구두를 조각해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던 적이 있는데, 자코메티는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후 둘은 함께 벼룩시장을 방문했는데, 거기서 브르통은 손잡이에 신발이 달린 숟가락을 산다. 이를 본 순간 브르통은 그 숟가락에서 신데렐라 구두를 떠올렸고, 그 형태가 중복(double)되는 것에 '경이'로운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사고방식이 대략 이런 식인 것이다. '우연'을 강조하고, 그 우연한 상황에서 경험한 언캐니한 느낌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느낌을 매개하고 표현하는 수단으로 우연히 마주친 ‘발견된 사물’(objet trouvé)을 작품으로 만들거나[3], 이미지를 중복(doubling)시키는 등의 전략을 활용했다. 위의 숟가락이나 콜라주, 데칼코마니 등의 기법을 떠올려보자. '발견한 사물'을 쓰거나, 이미지들을 쌩뚱맞게 매치시켜 '언캐니'함을 자아낸다거나, 중복된 이미지를 보여준다거나 하는 방식이 이런 배경하에서 이뤄진 것이다.
물론 앙드레 브르통 중심의 주류파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무의식을 바라본 초현실주의 미술가들도 있었다.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가 대표적. 광고회사를 다니다 전업작가가 된 마그리트는 처음부터 자동기술법과는 전혀 다른 세밀한 재현에 기초한 초현실주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4] 그림에는 일단은 살바도르 달리처럼 왜곡된 형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마그리트는 익숙한 일상의 이미지를 뚝 떼어내어 엉뚱한 곳에 가져다 놓고 낯설게 만드는 것을 강조했다.[5] 이렇게 해서 마그리트는 다른 초현실주의자들과 달리 전통적인 회화에 따라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초현실주의 이미지의 범주를 넘어 보다 철학적이고 인식론적인 문제에 접근했다. 대표적으로 <이미지의 반역>에서 마그리트는 파이프를 그림으로 그린다. 이를 한국 속담으로 표현한다면 '그림의 떡'에 들어맞을 것이다. 우리가 보는건 사실 그림일 뿐, 진짜 파이프가 아니기 때문. 그렇게 보면 밑에 써놓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말이 사실인 셈이다. 이와 같이 마그리트는 이미지와 대상물, 그리고 언어의 관계 체계에 대해 질문했다.
역시 주류파가 아니었던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는 브르통과 좀 다른 이론을 내세웠다. 바타이유가 내세운 개념은 비정형[6]이었다. 비정형 개념은 바타이유가 기존의 철학체계를 비판하고 당대의 초현실주의 예술의 미학을 정의하기 위해 제시되었던 개념이다. 바타이유는 서구의 인습적 세계관과 철학 속에서는, 인간의 지적 능력을 넘어 넘쳐흐르는 세계의 비합리적이고 성스러운 차원이 일종의 초과분처럼 간주되어 언어적 질서 외부로 삭제되어 왔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바타이유가 제시한 비정형은 수학적인 엄밀성과 언어에 의해 정의된 것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언어적 형태적 정의로부터 벗어나 끊임없이 ‘탈정의화’되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한다.[7] 바타이유는 이런 비정형을 개념에 따라 초현실주의의 무의식을 성(性)이나 죽음과 같은 금기를 초월한 어떤 것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이런 바타이유의 이론에 따라 초현실주의 미술을 보게 되면, 초현실주의는 모호함으로 특징지어지게 된다. 예를 들면 미로의 <Relief Construction>을 보면서 '과연 저게 조각일까 회화일까?' '대체 뭘 표현하려고 한 걸까?'라고 느끼는게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딱히 정해놓고 만든게 아닌 '비정형'이니까.
사조를 간략화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지만, 머리 아픈 위키러들을 위해 정리하자면 끝없이 논리와 이성의 지배를 받기 좋아하는 인간 본성에 철저하게 저항한 예술사조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름다움을 정리하려고 들던 고전주의의 관습을 모조리 파괴한 인상주의와 결합하며 현대 미술까지 가장 큰 예술적-문화적 영향력을 끼치는 위대한 운동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정리가 도저히 안된다는 점에서 운동의 순수함과 정통성을 지켜내지 못한 예술사조이기도 하다. 이는 초현실주의 운동이 근원적으로 갖고 있던 모순점이기도 하였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던 초현실주의자들의 순진함은 정치까지 발을 들이며 결정적으로 무너지게 된다. 초현실주의 그룹은 당대 유럽에서 새로운 체제적 대안으로 떠오르던 공산주의를 굉장히 긍정적으로 보았고, 소련과 쿠바를 열심히 오가며 주축 인사들과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뭐 결과는 모두가 아시는대로. 그룹은 공산주의의 엄숙한 순수주의와 숙청을 흉내내다가 붕괴되어갔고 수장인 앙드레 브르통은 68혁명 때 다시 재기를 노리기도 하였으나 별 반향은 없었다.
3. 영향
[1] 동전 위에 종이 올려놓고 연필로 문지르는게 대표적인 프로타주 기법이다
[2] 여담이지만 일본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이론화한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도 프로이트의 이 언캐니 개념을 따온 것이다.
[3] 프랑스어로는 ‘오브제 트루베’, 영어로는 파운드 오브제(found object)라고 읽는다. 마르셀 뒤샹의 경우 기성품(readymade)을 자주 활용했는데, 이것도 발견된 사물을 취하는 초현실주의 전략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4] 실제로 마그리트는 그리 자동기술법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마그리트)는 자동기술법의 자칭 무의식상태를 신용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고,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영매적인 과정의 최종결과가 그에게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수지 개블릭. 르네 마그리트-
[5] 이렇게 사실적인 대상물을 전혀 엉뚱한 곳에 놓는 것을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라고 한다. 사실 콜라주 기법은 이 데페이즈망을 실현하는 방법중 하나로 볼수도 있다.
[6] 엥포름(informe). 영어로는 formless. 한국에서는 무정형이라고 많이 통용되지만 사실은 비(非)정형의 의미에 가깝다.
[7] 김원방, 조르주 바타이유에 있어 시각적 죽음과 현대미술, 유럽사회문화, Vol.4 No.-, 2010.
<초현실주의 작가 -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에스파냐의 초현실주의 화가. S.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설에 공명, 의식 속의 꿈이나 환상의 세계를 자상하게 표현했다. 스스로 ‘편집광적·비판적 방법’이라 부른 그의 창작수법은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환각을 객관적·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출생-사망: 1904.5.11 ~ 1989.1.23
국적: 에스파냐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에스파냐 피게라스
주요작품: 《안달루시아의 개》(1929), 《황금시대》(1931), 《기억의 지속》(1931)
1904년 5월 11일 피게라스에서 출생하였다. 14세 때부터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과격한 성품 때문에 1926년 퇴학당했다. 그는 보기 드문 조숙아로 일찍이 인상파나 점묘파·미래파의 특질을 터득하고 입체파나 형이상회화 등의 감화를 받으며 작풍편력(作風遍歷)을 하였다. 그러나 1925년경부터는 심기일전하여 정밀한 세부묘사로 향하고, S.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설에 공명, 의식 속의 꿈이나 환상의 세계를 자상하게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파리로 가서 초현실주의 화가나 시인들과 교유하였다. 이듬해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고, 이때 A.브르통에 의해 정식으로 이 파의 일원으로 인정되었다. 그 스스로 ‘편집광적·비판적 방법’이라 부른 그의 창작수법은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환각을 객관적·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이중영상의 활용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기상천외한 이미지의 묘출(描出)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1937년 이탈리아 여행을 계기로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로 복귀하려는 욕구가 커졌으며, 초현실주의 화가 모임에서 제명당하면서까지도 원자과학이나 가톨릭의 신비성을 추구하여 왕성한 제작을 하였다. 한편 그가 친구 L.부뉴엘와 합작한 전위영화 《안달루시아의 개》(1928)와 《황금시대》(1931)는 영화사에 독자적인 의의를 남겼으며, 가극이나 발레의 의상·무대장치 등 상업미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살바도르 달리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80005&mobile&cid=40942&categoryId=40241
<초현실주의 작가 -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살바도르 도밍고 펠리페 하신토 달리 이 도네메크(스페인어: Salvador Domingo Felipe Jacinto Dalí i Domènech, 1904년 5월 11일~1989년 1월 23일)은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판화가, 영화 제작가이다.
생애
그는 카탈루냐의 피게레스(Figueres)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형 이름 또한 살바도르였다. 그가 태어나기 9개월 전인 1903년 8월 1일 죽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 또한 살바도르였는데 중산층 변호사였다.
마드리드의 미술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28년 파리로 가서 초현실주의 화가와 작가들과 사귀고,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가했다. 그의 수법은 '환상적 사실주의'라고도 불린다. 또, 영화 <황금시대>를 제작한 외에 로트레아몽의 시집 <말도로르의 노래>의 삽화를 그렸다.
뒤에 미국에 건너가 정통적 초현실주의를 떠난 후, 가극·발레의 의상 등 장식 예술 분야에서도 활약하였다. 또 디즈니와 협력하여 드라마 제작에도 종사하였다. 귀국 후의 작품으로 <잉태한 성모>가 있다.[1] 제 2 차 세계대전 후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의하고 그의 아내인 갈라(Gala Eluard Dalí)를 성모 마리아에 비유한 종교화를 연작했다. 갈라는 달리의 뮤즈이자 통치자이자 매니저였다. 그는 또한 독일의 히틀러를 찬양해 다른 초현실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그의 히틀러에 대한 숭모는 다음과 같은 글에 잘 나타나 있다.
“ 나는 항상 제복에 꽉 조여진 히틀러의 부드럽고 살찐 등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벨트에서부터 어깨까지 가로지르는 히틀러의 가죽끈을 그리려 할 때마다 군복으로 포장된 그의 살의 부드러움에 두근거리는 바그너적 황홀경에 빠진다. 나는 사랑의 행위 중에도 이같은 극도의 흥분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2] ”
또 달리는 히틀러를 소재로 〈히틀러의 수수께끼(The Enigma of Hitler,1938)〉라는 그림도 그렸다.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달리는 스페인에서 달아났는데 조지 오웰은 이런 그를 "쥐새끼처럼 달아났다"며 비판했다. 달리의 자서전에 대한 1944 년의 주목할만한 연구에서, 조지 오웰은 다음과 같이 썼다
“ 사람들은 달리가 훌륭한 기초자이면서 역겨운 인간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머리 속에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
달리는 2차 세계대전 종전후 카탈로니아에 귀국 한 후 프란시스코 프랑코 (Francisco Franco)의 권위주의 정권과 밀착했다. 달리의 성명 중 일부는 "스페인에 파괴적인 세력(공화주의자들)을 제거하는"것을 목표로 한 프랑코의 행동에 대해 축하의 뜻을 전달했다. 달리는 프랑코에게 감옥에 갇힌 공화주의자들에 대한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한 것을 칭찬하면서 전보를 보냈다. 그는 개인적으로 프랑코를 만났고, 프랑코 손녀의 초상화를 그려줬다.
달리는 또 2차 세계대전 후 원자폭탄을 찬미하는〈멜랑코리, 원자, 우라늄의 목가(Melancholy, Atomic, Uranic idyll,1945)〉라는 그림도 그렸는데 멜랑코리라는 제목 덕분에 이 그림은 종종 전쟁의 비극과 핵폭탄에 대한 경고로 읽히곤 하였지만 이는 적절한 해석이 아니다. 달리는 또 비키니 섬에서 벌어진 핵실험을 소재로 〈비키니섬의 세 스핑크스(Three Sphinxes of Bikini,1947)〉라는 작품도 그렸다.
참고 위키대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82%B4%EB%B0%94%EB%8F%84%EB%A5%B4_%EB%8B%AC%EB%A6%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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