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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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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전문 크리에이터 대미술관이 '최문봉' 작가님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이번 전시는 2025 06/11 – 06/16까지 갤러리인사아트에서 전시를 하고 있었어요.








최문봉 개인전 Empathy
최문봉
2025 06/11 – 06/16
본 전시장 (1F) / 특별 전시장 (B1)
Empathy ~ 품고 스미고 피어나다



“감정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 공감은 그 흐름을 품는 일이다. 자연이 그렇듯, 감정도 순환한다. 스치듯 지나가도, 사라지지 않고 언젠가 다시 피어난다.”나는 그 순환의 언어를‘할미꽃’‘포자’그리고‘하얀씨앗’ 에서 얘기한다.

감정은 품고 스민다.

한 존재의 마음에서 흘러나온 정서는 공기처럼 퍼지고, 눈에 보이지 않아도 누군가의 내면에 닿아 작은 떨림을 남긴다.

그 떨림이 마음의 토양에 닿을 때, 보이지 않는 감정의 씨앗이 틔어진다. 공감은 그렇게 시작된다.

본인은 자연의 순환 구조가 인간 감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생명은 죽음을 포함한 과정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감정 역시 흘러가며 새로운 감정을 낳는다.

자연과 감정은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흐름이며, 공감은 그 흐름을 따라 타인의 감정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능동적인 ‘생성’의 행위다.



자연은 늘 그렇게 다름을 품는다.

포자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씨앗처럼 바람에 흩날려, 스치듯 흘러가도 어디선가 생을 틔운다. 나는 감정도 그러하다고 믿는다. 말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 안에는 서로의 감정을 품을 수 있는 토양이 있다. 나의 작업들 속엔 그런 ‘마음의 씨앗’이 있다. 조용히 감정을 건네고 무언가를 피워내길 기다리는 작은 흔적들..

자연의 순환처럼 감정도 흐르고 스며드는 것이라면, 공감은 바로 그 흐름을 막지 않고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감정은 멈춰진 대상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유기적 생명체다. 우리가 타인의 감정에 스며들고, 그것이 다시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이 순환은,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연결의 질서다.

Empathy는 타인의 계절을 함께 살아내는 일이다.

봄의 설렘, 여름의 번뇌, 가을의 수확, 겨울의 쓸쓸함까지도 스며드는 ‘공감’은 감정의 언어를 넘어, 존재의 리듬에 귀를 기울이는 깊은 이해다.



나의 작업은 그런 감정의 씨앗들이 스며있다.

‘포자’는 멀리서 날아와, 머문 자리에 생명을 싹틔운다.

마치 공감의 언어가 그렇듯, 작고 미세한 감정의 흔적이 누군가의 마음에 스며들어 오래도록 남는다.

‘하얀씨앗’은 감정이 입혀지기 전, 가능성이 가득한 상태이다. 이 하얀 마음은 누구의 감정도 담을 수 있고, 누구의 경험도 새겨 넣을 수 있다. 그 가능성 속에서 피어나는 건‘행복’과‘긍정’의 씨앗이다.

타인의 아픔을 가만히 품어주는 시간은 때로 스스로를 치유하는 시간이 되며, 이해받는 경험은 다시 다른 이에게 공감을 건네는 선순환으로 이어진다.

‘Empathy’ 는 나와 다른 감정 , 다른 경험을 품는 일이다.

‘나와 다르다’ 는 인식에서 시작해 그래서 ‘더 이해하고 싶다’ 는 마음으로 이어지는 것. 그것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태도이며, 진정한 공감의 시작이다. 내가 가진 익숙한 감정을 잠시 접고, 타인의 낯선 온도에 나를 열어주는 감정적 용기이자, 공감 노력의 시작이다.

‘품고, 스미고, 피어나다’는 감정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고 그저 머무르고 받아들이는 자세,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닌, 나의 마음 안에 품어 그 감정의 결을 살아보는 일이다.



이 공간은 이‘하얀씨앗’을 품는 곳이다.

보는 이의 마음속 기억들과 만나면서 색을 얻고, 이름을 얻는다. 공감은 그렇게 타자의 감정을 내 안에서 새롭게 발아시키는 일이다.

이 공간에 머무는 동안, 여러분 마음에도 작고 보드라운 감정의 씨앗 하나가 떨어지길 바란다. 조용히 날아가 누군가의 마음에 닿고, 그 씨앗은 언젠가 당신의 내면에서 싹이 트고, 꽃이 되고, 다시 누군가의 마음에 스미게 될 것이다.

그렇게 감정은 순환하고, 공감은 자란다.

2025. 4. 17 작가노트








나를 내려놓고 너를 품다
최문봉 작가 ‘Empathy ~ 품고 스미고 피어나다’

불의 살핌, 여름의 번성, 가을의 수확, 겨울의 쓸쓸함까지도 스며드는 ‘공감’은 감정의 언어를 넘어, 존재의 리듬에 귀를 기울이는 깊은 이해다.
나의 작업은 그런 감정의 씨앗에 스며있다. ‘포자’는 열리듯 날아와, 머문 자리에 생명을 씨뿌린다.
마치 공감의 언어가 그렇듯, 작고 미세한 감정의 흔적이 누군가의 마음에 스며들어 오랫도록 남는다.
‘하얀씨앗’은 감정이 응집되기 전, 가능성이 가득한 상태이다. 이 하얀 마음은 누구의 감정도 담을 수 있고, 누구의 경험도 새겨 넣을 수 있다.
그 가능성 속에서 피어나는 건 ‘행복’과 ‘긍정’의 씨앗이다.








최문봉 작가의 작업 노트에서 작가는 이번 전시 화두(重頭)를
‘Empathy—공감(共感)’이라 말하고 있다.

“Empathy - 공감은 나와 다른 감정, 다른 경험을 품는 일이다.”
“나와 다르다는 인식에서 시작해 더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지는 것. 그것이 진정한 공감의 시작이다.”
“내가 가진 익숙한 감정을 잠시 접고, 타인의 낮선 온도에 나를 열어주는 감정적 용기이자, 공감이란 노력의 시작이다.”
“감정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고 그저 머무르고 받아들이는 자세,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닌, 나의 마음 안에 품어 보는 것이다.”

– 작가노트 –








공감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empathy’의 어원은 독일어인
‘Einfühlung’ (Robert Vischer(1873) 예술 감성에서 사용한 개념)으로
(Ein: 한쪽, fühlung: 느끼다)에 기원을 두고 있다.
미술 심리학적 측면에서 이 단어는 자신의 상상을 통해 생성된 감정을
대상에 투영하여 이해해 보는 ‘감정 이입’으로 정의되며, 관람자가
예술 작품을 감정적으로 동일시하는 경험을 의미했던 주체적인
주관적인 단어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 단어를 넘돌며
내가 타자임을 인정하고, 타자의 입장에서 서서 그들의 생각을 이해
해 보며 더 나아가 그들의 감정과 동화(同化)되려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의 태도와 관점”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자신만의 노력”이라는 이
타적 관점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단어는 곧 공감의 꿈임이며, 작가가 타인의 마음, 타인의 감정, 타인
의 현재 상태인 그 사물의 입장에서 서서 느끼고 이야기해 보고자 한
작가의 작품들로 드러났다.

2022년 작가의 자유를 바라보며 가장 강하게 느꼈던 질문은 그러하였
다. 어느덧 3년이 지나 다시 작가의 자유를 마주 보며 느낀 질문은
자유로움이 느껴지는즉 작가뿐일까이다. 도대체 남을 이해하려는 것
과 자유로움 그리고 말없이 묵가뿐한 감정과의 동질성이 무엇인지
궁금해질 뿐이다.

시(恕)라는 글자가 스쳐 지나갔다.
– [논어 論語] 《위령공 衛靈公 二十三章》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평생을 두고 마음에 담아 실천할 만한 한
단어가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것은 시(恕)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가하지 말아라."
恕爾 文曰. (子貢 問曰) 유일언인가중선행지자요(有一言而可以
종일(終日) 기시오 기소불욕 물시어인(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이 ‘시(恕)’라는 글자에 대한 내용은 《중용 中庸》 <十三章>에
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충서(忠恕): 진심으로 남을 나처럼 여기려는 마음"는 도(道 진리)와
거리가 멀지 않으니, 나에게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행하
지 말라."
충서 위도불원(忠恕爲道不遠) 시기기불원 어불시인(能近之
而不願 亦勿施於人)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용서(容恕)라는 단어에 사용되는 글자인 시(恕)자는 갑골 이(心)와 마음 심(心)자로 파자(破字) 된다. 이 글자는 상대하고 있는 대상(他者)과 같은 마음(心)이 되는 것을 의미한
다. 본디 이(恕)의 의미는 ‘순응(順從)’이었다. 이는 그 어원이 고대 부권(父權) 중심 사회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恕)는 오늘날 ‘같다, 같게 하다, 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
에 가해지다), 닮다, 좋다, 따르다, 비슷하다’로 사용되고 있기에, 목적의 순응의 의미보다 대상과 내가 동화(同化)되는 의미로서 ‘~ 와 같다’라는 맥락으로 사용됨이 옳다.

풀어보자면 시(恕)자는 ‘대상의 상태나 마음을 이해해서 그 대상과 동화(同化)되는 상태 또는 되고자 하는 의지를 지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 용서(容恕)라는 단어는 대
상(타자 他者)과 같은 마음(心)을 품어(恕)서 그 대상의 마음을 이해(공감 共感)해야지만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남을 나와 같게 이기는 마음’인 시(恕)자는 자신을 용서하는 것과 같이 대상을 용서하고 인정하는 마음이기에, 시(恕)를 실행하
기 위해서는 서사자(恕)인 인과의 일련의 사건과 사물에 대한 주체자의 인내와 희생 그리고 용기와 포용이 필요하다. 그러니 시(恕)가…




대상을 나와 같이 받아들이는 것, 공감은 대상과 내가 하나로 동화되는
것에 대한 동의와 이해의 의지이자, 그것은 받아들임의 행위(體驗 혹은 體인)이다.
현재 작가가 이야기하고 있는 동화(同化)의 의미인 “Empathy – 공감”은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어릴적 모로씨 [장자 莊子] 『외편 外篇』
<제물론齊物論>의 즐거움(樂之論)을 본뜬 장자의 메시지의 대화가 모아
져 흘러버린다. 이 공감은 타인의 의견이나 감정을 스스로 인
정하고 포용할만한 이성적 수 있는 것인가? 그 인식을 바탕으로 이해
되는 인식의 관점에서 이해되는 심미경계(藝美境界)로 파악된다.
작가의 이러한 심미경계는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계합음(倶會音)의
두 가지 방식 중 도요(道耀)보다 접수(無極)에 유사하다. 즉 순간적
인 몰입이나 몰여짐이라기보다, 오래되고 충실된 삶 위의 맛인 ‘비
어남’과 유사하다. 이처럼 엄숙하고 비장한 작가의 화두(畫頭)가 지
닌 종합감과 다르게 그녀의 작품은 안회이 음가불화기만 하다. 그
래서 다시 유심히 작가 노트를 들여 본다.

“감정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 공감은 그 흐름을 품는 일이
다.
자연이 그렇듯, 감정도 순환한다.
스치듯 지나가도, 사라지지 않고 언젠가 다시 피어난다.”
“자연과 감정은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흐름이며,
공감은 그 흐름을 따라 타인의 감정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능동적
인 ‘생성’의 행위다.”
자연은 그렇게 다름을 품는다.

- 작가노트 –



작가가 말하고 있는 ⟪Empathy – 공감⟫은 감정(한 根)이 승화된
상태 즉 인과(因果)의 구속됨에서 벗어 나를 내려놓은 상태로 접착
하는 마음을 잊어버리는 상태인 방하착(放下着)과 닮아있다.
즉 작가의 공감 방식은 "나를 내려놓고 너를 품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니 작가의 작품이 이렇게 몸가분한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의 작품은 대상을 통해 표출되는 감정이 나를 어떻게 바꾸는가
또는 대상에 대한 나의 감정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의심 원망과 노여움 따위의 불완전성을 떨쳐내고, 자연계에
귀속되어 그저 공(空)의 세상에 몸을 맡기는 결과인 것이다.

"우리 안에는 서로의 감정을 품을 수 있는 토양이 있다. 나의 작업
속엔 그런 ‘마음의 씨앗’이 있다."

- 작가노트 -

또한 작가는 자신만의 내려놓음(放下着) 방식으로 마음이 미 받아
된 상태 즉 미정(未定)과 미완(未完)의 무의식 상태를 선택함으로
써 최종 결정은 각자의 것으로 남겨두고 있다.


자연에서 생물의 생장이 개체의 생장 조건에 따라 생물체 생육 그
리고 성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이해할 때, 작가가 지닌 마음의 씨앗
이고 결과를 스스로 예단하지 않고 미완의 상태를 남겨둠으로써 작
심이 결정을 떠나는 심리적 부담을 덜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단순히 순간적인 결정이나 결과에 대한 외면
이 아니라 그 인지가 가져올 모든 가능성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자기 인내와 수양이 근저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작가의 공
감이 가지고 있는 심미경계는 사회의 맛 또는 "비워냄"과 닮아있는
것이다.
나를 내려놓음으로써 너를 품고자 하는 최문봉 작가의 작품을 바라
보며 내 마음이 가벼울 수 있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불안이 작
품을 통해 해소된 것이라기보다 그 불안경험을 작가의 작품에 의탁하여 내려놓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종의 또 다른 심리 정화
(Catharsis) 작용에 의한 것이었으리라.

“어머니(마루 憫鬱)의 품이구나. 복잡하고 힘든 마음을 언제든 내
려놓을 수 있는 곳, 내 모든 것을 이해해주고 위로해 줄 수 있는 대
지와 같은 안마당에 모든 번뇌를 털어 둘 수 있는 곳.”

울고리고 있는 생각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이 참 맑다. 잠시나마 편히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작가의 작품을 통해 내가 아닌 너를 품을 수
있는 삶의 여유를 얻어가시길 바라며 두서없는 글을 마친다.

– 2025년 강릉에서 장태영 (강릉원주대학교 교수) –





‘포자’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씨앗처럼 바람에 흩날리며, 스치듯 흘러가도 어디선가 생을 틔운다.
나는 감정도 그러하다고 믿는다. 말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 안에는 서로의 감정을 품을 수 있는 토양이 있다. 나의 작업들
속엔 그런 ‘마음의 씨앗’이 있다.

조용히 감정을 건너고 무언가를 피워내길 기다리는 작은 흔적들…
자연의 순환처럼 감정도 흐르고 스미는 것이라면, 공감은 바로
그 흐름을 막지 않고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감정은 멈춰진 대상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유기적 생명체다.
우리가 타인의 감정에 스미들고, 그것이 다시 우리에게 영향을 주
는 이 순간은,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연결의 질서다.
‘포자’는 멀리서 날아와, 마른 자리에 생명을 싹틔운다.
마치 공감의 언어가 그렇듯, 작고 미세한 감정의 흔적이 누군가의
마음에 스며들어 오래도록 남는다.

이 공간은 이 ‘하얀씨앗’을 품는 곳이다.
보는 이의 마음속 기억들과 만나면서 색을 입고, 이름을 얻는다.

공감은 그렇게 타자의 감정을 내 안에서 새롭게 받아시키는 일이다.
이 공간에 머무는 동안, 여러분 마음에도 작고 보드라운 감정의 씨
앗 하나가 떨어지길 바란다.
조용히 날아가 누군가의 마음에 닿고, 그 씨앗은 언젠가 당신의 내면
에서 싹이 트고, 꽃이 되고, 다시 누군가의 마음에 스미게 될 것이다.
그렇게 감정은 순환하고, 공감은 자란다.

최문봉 작가의 2025 개인전 ‘Empathy 품고 스미고 피어나다’는
6월 11일(수)부터 16일(월)까지 서울 종로 인사이트갤러리 제1전
시장에서 개최된다.







아래부터는 '최문봉' 작가님 작품들이에요.

최문봉 작가 작품

 

 

 

 

 

 

 

 

 

Empathy - Act 5

 

 

 

 

 

 

 

 

 

Empathy - Act 6

 

 

 

 

 

 

 

 

 

Empathy

 

 

 

 

 

 

 

 

 

최문봉 작가 작품

 

 

 

 

 

 

 

 

Empathy - Act 5

 

 

 

 

 

 

 

 

 

Empathy - Act 6

 








사진의 작품들은 작가 및 관계자들의 허락으로 촬영하였습니다.

이 사진들 안의 작품들은 작가 및 관계자들의 허락없이 무단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대미술관의 유튜브 채널 '대미술관의 갤러리스타'에서 생생한 갤러리 영상으로 그림을 감상하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JaMTD_x6Vz-H1Za2ESPnXw

 

대미술관의 갤러리스타BIG GALLERY's Gallery Star

미술(그림)에 취미가 있거나 갤러리를 구경가고 싶지만 바빠서 못가시는 분들, 몸이 불편해서 갤러리를 못가시는 분들을 위해서 대미술관이 대신해서 갤러리 전시를 보여줘요.. 잔잔한 음악과

www.youtube.com

 









대미술관의 틱톡 채널 'Big_Gallery_Star'에서 생생한 갤러리 영상으로 그림을 감상하세요.
https://www.tiktok.com/@big_gallery_star

 

TikTok의 Big_Gallery_Star

@big_gallery_star 팔로워 161명, 5명 팔로잉, 좋아요 3069개 - Big_Gallery_Star 님이 만든 멋진 짧은 동영상을 시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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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갤러리인사아트  위치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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