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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갤러리

이경주 작가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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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주 작가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책은 늘 소유하고픈 대상이었고 서재는 나의 로망이었다.

 

이제 그 꿈을 담아 하나씩 나의 컬렉션을 완성해 간다.

 

'책 읽을 여가가 없을 때에는 그림에 마음을 노닐고 눈을 머물게 하니 오히려 이보다 더 현명할까?

금릉집에 전하는 정조의 말을 떠올리며 오늘도 책거리 산책을 나간다.

 

민화는 품이 많이 드는 작업입니다.

 

헌신적인 가족들, 화우들, 제자들...

 

어떤 감사의 말로도 부족한 강효진 선생님

 

그들이 있어 내 서재는 책으로 가득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이경주 작가님 동덕여대 동양화과를 졸업 하셨어요~~~^^

 

 

 

이경주 작가님 개인전은 2회 전시를 하셨어요~~~^^

 

개인전을 한 장소는

 

2019 서재로망(갤러리이즈)

 

2017 이경주의 책거리 산책(성북동 작은갤러리)

 

에서 전시를 하셨어요~~~^^

 

 

 

이경주 작가님단체전 및 전시를 한 곳은

 

2019 대갈화사회원전(가회박물관)

 

2019 뉴웨이브전(인사아트프라자)

 

2018 책의 도시 인천 책가도를 만나다(미추홀문화회관)

 

2018 인천 민화협회 창립전(인천문화예술회관)

 

2018 민수회 회원전(경인미술관)

 

2017~2018 책거리전(미추홀문화회관)

 

2017 대갈화사 회원전(인사아트센터)

 

2017 창작 리메이크전(인사아트프라자)

 

2016 루브르 아트쇼핑 부스전(프랑스 루브르박물관)

 

2016 민수회 회원전(라메르)

 

2016 고양민화협회 초대작가(고양아람누리)

 

2015 한국민화의 오늘전(미술세계갤러리)

 

2015 터키 교류전(터키문화원)

 

2014~2015 대갈화사 회원전(가희박물관)

 

2014 5인 그룹전(경인미술관)

 

2013 쇼미 그룹전(미국 LA문화원)

 

에서 전시를 하셨어요~~~~^^

 

 

 

이경주 작가님수상경력

 

2016 전국미화 공모전 최우수상

 

2014 현대민화 공모전 최우수상

 

을 수상하셨어요~~~~^^

 

 

 

 

이경주 작가님은 현재

 

인천 민화협회 이사

 

민수회 회원

 

대갈화 회원

 

이경주 민화공방 운영

 

하고 계셨어요~~~~^^

 

 

 

 

아래 부터는 이경주 작가님 작품들이에요~~~^^

 

책가도 병풍 | 전국민화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작품 | 2016

 

 

 

 

 

책들의 도시 | 2017

 

 

 

 

 

금빛 물결 | 2016

 

 

 

 

 

한국국보 책가도 | 2019

 

 

 

 

 

도자기문양 책거리 | 2016

 

 

 

 

 

백묘 책거리 | 2014

 

 

 

 

 

탁장기혈도 | 2018

 

 

 

 

<내가 본 전시회 느낌>

 

이경주 작가님 작품들의 주제는 주로 해바라기 및 꽃을 주로 그리셨어요.

 

이경주 작가님의 추상주의적 기법으로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이경주 작가님의 작품을 보게 되어서 행운이였고 다음 전시회가 또 기대가 되네요.

 

 

 

 

이 작품 사진들은 작가의 촬영 허락으로 제작 하였습니다.  
이 작품 사진들 안의 그림들은 작가의 허락 없이 무단 사용을 할 수 없습니다



 

 

아래는 갤러리이즈 위치에요~~~^^

 

 

 

 

 

 

아래는 이경주 작가님과 같은 민화를 찾아보았어요~~~~^^

 

 

<민화[ 民畵 ]>

 

정통회화의 조류를 모방하여 생활공간의 장식을 위해, 또는 민속적인 관습에 따라 제작된 실용화(實用畵)한다. 조선 후기 서민층에 유행하였으며, 이규경(李圭景:17881865)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이를 속화(俗畵)라 하고, 여염집의 병풍·족자·벽에 붙인다고 하였다. 대부분이 정식 그림교육을 받지 못한 무명화가나 떠돌이화가들이 그렸으며, 서민들의 일상생활양식과 관습 등의 항상성(恒常性)에 바탕을 두고 발전하였기 때문에 창의성보다는 되풀이하여 그려져 형식화한 유형에 따라 인습적으로 계승되었다. 따라서 민화는 정통회화에 비해 수준과 시대 차이가 더 심하다.

민화는 장식장소와 용도에 따라 종류를 달리하는데 이를 화목(畵目)별로 분류하면 화조영모도(花鳥翎毛圖)·어해도(魚蟹圖)·작호도(鵲虎圖)·십장생도(十長生圖)·산수도(山水圖)·풍속도(風俗圖)·고사도(故事圖)·문자도(文字圖)·책가도(冊架圖)·무속도(巫俗圖) 등이 있다.

① 화조영모도:민화 가운데 종목이 가장 많으며 꽃과 함께 의좋 노니는 한 쌍의 새를 소재로 한 화조도가 많다. 화조도는 매화·동백·진달래·개나리·오동·솔·버드나무·메꽃·해당화 등과 봉황·원앙·공작·학·제비·참새·까치 등을 물이나 바위와 함께 그렸으며 주로 병풍으로 재구성되어 신혼부부의 신방 또는 안방 장식용으로 쓰였다. 이 밖에도 작약·월계·모란·옥잠화·수선·들국화·난초에 나비나 메뚜기·꿀벌 등을 그린 초충도(草蟲圖)와 사슴·토끼·말·소·호랑이 등을 산수 속에 표현한 영모도가 있다. 이 소재들은 단독으로 그려지는 경우도 많으며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꽃도 단독으로 그려 혼례식의 대례병(大禮屛)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② 어해도:물속에 사는 붕어·메기·잉어·복어·송사리·거북·게·새우·조개를 소재로 한 그림으로, 꽃과 해초를 곁들여 그린 경우가 많다. 주로 젊은 부부의 방 장식으로 쓰였으며, 잉어를 아침 해와 함께 그리는 경우 출세를 기원한다든지 경축일의 축하용으로 사용되었다.

③ 작호도:소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까치와 그 밑에서 이를 바라보며 웃는 듯이 앉아 있는 호랑이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수호신적인 역할을 했던 사신도(四神圖)의 한 변형으로 보이며, 까치의 경우 주작(朱雀)의 변용으로 풀이된다. 작호도는 잡귀의 침범이나 액을 막는 일종의 벽사용(辟邪用)으로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④ 십장생도:장수(長壽)의 상징인 거북·소나무·달·해·사슴·학·돌·물·구름·불로초를 한 화면에 배치하여 장식적으로 처리한 그림이다. 세화(歲畵)로 그려지기도 하고, 회갑잔치를 장식하는 수연병(壽筵屛)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⑤ 산수도:금강산이나 관동팔경(關東八景)과 같은 산천을 소재로 그린 실경산수(實景山水)와 중국식(中國式) 산수로 나눌 수 있다. 병풍으로 꾸며져 객실이나 사랑방용으로 많이 쓰였다.

⑥ 풍속도:농사짓고 베짜는 모습을 그린 경직도(耕織圖), 태어나서 출세하고 죽을 때까지의 일생을 그린 평생도(平生圖), 사냥하는 장면을 그린 수렵도(狩獵圖), 일상생활의 장면이라든가 사철의 풍속을 그린 세시풍속도(歲時風俗圖) 등이 있다.

⑦ 고사도:고사와 민화(民話), 소설 등의 내용을 간추려 표현한 그림으로, 교화용(敎化用)으로 많이 제작되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이야기를 담은 열락도(悅樂圖)를 비롯하여 삼고초려도(三顧草廬圖)·상산사호도(商山四皓圖), 그리고 삼국지(三國志)·구운몽(九雲夢)·토끼와 거북 이야기 그림 등이 있다.

⑧ 문자도:글자의 의미와 관계가 있는 고사 등의 내용을 자획(字畵) 속에 그려넣어 서체(書體)를 구성하는 그림으로, () 또는 복()자를 도식화한 수복도와 효()·제()·충()·신()·예()·의()·염()·치()를 도식화한 효제도(孝悌圖)는 교화용으로 제작되어 주로 어린이방을 장식하였으며, 이러한 문자도는 혁필화(革筆畵)라고 하는 서체 위주의 비백도(飛白圖)로 변용되기도 했다.

⑨ 책가도:책거리라고도 하는데, 책을 중심한 문방사우도(文房四友圖)나 문방구도에서 온 것이다. 책뿐만 아니라 책과 관계없는 술잔·바둑판·담뱃대·부채·항아리는 물론이고 여자치마·꽃신·족두리까지 그려 어떻게 조화가 이루어지는가를 표현한 그림이다.

⑩ 무속도:산신(山神)이나 용신(龍神)을 비롯한 무교(巫敎)의 여러 신과, 도교(道敎)의 신들, 그리고 불교의 불보살(佛菩薩)들을 무속화한 그림으로 신당이나 무당집에 걸렸다. 점쟁이들의 점복도(占卜圖)·부적(符籍)도 무속도의 일종이다.

이러한 화목들 이외에 백자천손(百子千孫)을 기원하는 백자용도(百子龍圖)라든지, 호피도(虎皮圖)·문양도(紋樣圖)·괴석도(怪石圖), 인두로 그리는 낙화(烙畵) 등도 민화의 범주에 든다. 다양한 유형으로 이루어진 민화는 생활형식의 오랜 역사와 밀착되어 형성되어, 내용이나 발상 등에는 한국적인 정서가 짙게 내재해 있다. 민화는 정통회화에 비해 묘사의 세련도나 격조는 뒤떨어지지만, 익살스럽고도 소박한 형태와 대담하고도 파격적인 구성, 아름다운 색채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양식은 오히려 한국적 미의 특색을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민화를 우리 민족의 미의식과 정감이 가시적(可視的)으로 표현된 진정한 의미의 민족화로 보고, 일본인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 '오오쓰에[大津繪]'라는 일본의 민속적 회화에 붙였던 명칭에서 비롯된 민화를 '겨레그림'으로 바꿔 부르자는 의견도 있다.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민화 [民畵]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97074&cid=40942&categoryId=33052

 

 

<민화>

민화(民畵)는 과거에 실용(생활공간의 장식이나 민속적인 관습에 따름)을 목적으로 무명인에 의하여 그려졌던 대중적인 실용화를 말한다. 참고 민화장이란 용어는 민화를 잘 그리는 사람을 말한다.

민화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일본어: 柳宗悅, 18891961), 그는 '민속적 회화'라는 의미로 민화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뒤 <공예적 회화>라는 글에서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에 의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을 민화라고 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야나기가 민화란 용어를 쓰기 이전부터 우리 나라에서도 민화에 대한 개념은 있었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는 여염집의 병풍ㆍ족자 또는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을 '속화(俗畫)'라고 칭하였다.

민화는 산수, 화조 등의 정통 회화를 모방한 것으로 소박하고 파격적이며 익살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기원

민화의 기원은 선사시대 암각화(岩刻畵)에서 물고기·거북·사슴·호랑이 등에서 민화의 원초적인 화맥(畫脈)을 찾을 수 있다.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四神圖신선도, 백제 산수문전(山水文塼)의 산수도, 등은 민화적 소재이며, 특히 처용설화(處容說話)에서 처용의 화상을 문설주에 붙이면 역신(疫神)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벽사(辟邪)를 위한 그림을 대문에 붙였던 풍습은 조선 말기까지도 별성마마 그림 등을 붙이던 풍습으로 이어졌다. 이 밖에도고려사조선왕조실록≫ 등에 보이는 세화(歲畫)와 도화서 화원들의 그림에 대한 기록을 볼 때 민화는 우리 민족과 함께 존재해 왔다고 볼 수 있다.

  

특징

민화와 정통회화가 같은 종류로 중복되는 것을 볼 수 있으나, 감상적 회화성에 화관을 둔 정통회화와 실용적 상징성에 화관을 둔 민화와는 차이가 있다. 정통회화에서 볼 수 있는 종류는 민화에서도 대부분 존재하며, 또 민화만이 가지고 있는 대상도 상당히 많아 어느 부류의 그림보다 광범위하고 풍부하다. 민화를 내용상으로 보면 무속ㆍ도교·불교·유교계통과 장식용 민화로 대분된다.

무속과 도교계통의 그림은 장생도 종류로 십장생도·송학도·군학도·해학반도도·군록도·천리반송도·오봉일월도 등이 있다. 방위신으로는 청룡·백호·주작·현무·황제 등이 있고 12지신상의 민화는 벽사진경을 위한 민속에 얽힌 작품이다. 호랑이 그림으로는 작호도·호피도 등과 산신도에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으며, 그밖에 닭·개·사자 그림 등 벽사진경의 뜻을 지니고 있다. 용왕도는 봉황·기린과 함께 상서로움을 기원하는 그림이며, 칠성·별성·오방신장 등 무속과 관계있는 그림이 많다.

불교계통의 민화로는 산신각·칠성각 등에 있는 그림과 탱화·심우도 등이 있다.

유교계통의 민화로는 효자도·행실도·문자도효제충신·예의염치·평생도 등 여러 계통의 그림이 있다.

장식용 민화로는 산수화를 비롯해서 화훼·영모·초충·어해·사군자·풍속화·책거리도·문방사우도·기명절지도 같은 정물화 등 많은 종류의 민화가 있다.

우리 민화는 민족문화의 여러 모습을 폭넓게 묘사했으며, 그 중에도 생활철학과 생활감정을 그림 속에서 구체화시키면서 민중의 생활 속에 정착하고 존속해 왔다. 이 속에는 기원과 위안으로, 또는 보는 즐거움을 담고 있다.

따라서 민화는 민족의 창의성과 시대상을 엿볼 수 있고, 생활감정과 미의식을 느낄 수 있는 민족의 문화유산이다.

 

참고: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AF%BC%ED%99%94

  

 

 

<민화>

 

1.1. 개요 民畵

조선시대 서민들이 향유했던 그림.

 

1.2. 설명

정통회화의 조류를 모방하여 생활공간의 장식을 위해, 또는 민속적인 관습에 따라 제작된 실용화(實用畵)를 말한다. 조선 후기 서민층에 유행하였으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이를 속화(俗畵)라 하고, 여염집의 병풍·족자·벽에 붙인다고 하였다. 대부분이 정식 그림교육을 받지 못한 무명화가나 떠돌이화가들이 그렸으며, 서민들의 일상생활양식과 관습 등의 항상성에 바탕을 두고 발전하였기 때문에 창의성보다는 되풀이하여 그려져 형식화한 유형에 따라 인습적으로 계승되었다. 따라서 민화는 정통회화에 비해 수준과 시대 차이가 더 심하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민화를 우리 민족의 미의식과 정감이 가시적으로 표현된 진정한 의미의 민족화로 보고, 일본인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오오쓰에(大津繪)'라는 일본의 민속적 회화에 붙였던 명칭에서 비롯된 민화를 '겨레그림'으로 바꿔 부르자는 의견도 있다.

 

조선시대 민화는 현세적인 염원을 주제로 시대에 따라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형식에 있어서는 화조도, 설화도, 십장생도 등 정형화된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전통회화의 답습에서 시작된 이러한 유형의 확립은 민화가 장식적인 용도로 일반화 되면서 더욱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또 진채의 사용, 형태의 과장, 구성의 반복 등 기법에 있어서도 독자적인 영역을 이루어 나갔다.

  

 

 

김홍도[ 金弘道 ]

 

요약조선시대의 화가. .정조의 문예부흥기부터 순조 연간 초기에 활동했다. 어린 시절 강세황의 지도를 받아 그림을 그렸고, 그의 추천으로 도화서 화원이 되어 정조의 신임 속에 당대 최고의 화가로 자리 잡았다. 산수, 인물, 도석, 불화, 화조, 풍속 등 모든 장르에 능하였지만, 특히 산수화와 풍속화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출생-사망 : 1745 ~ 1806? 

본관 : 김해(金海) 

  : 사능(士能) 

  : 단원(檀園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첩취옹(輒醉翁) 

국적 : 한국 

활동분야  : 회화 

출생지 : 미확인 

주요작품 : 《군선도》(1776), 《서원아집도》(1778), 《행려풍속도》(1778), 『단원풍속도첩』(18세기 후반), 《송월도》(1779), 《단원도》(1784), 『금강사군첩』(1788), 『을묘년화첩』(1795), 『병진년화첩』(1796), 《마상청앵도》(18세기 후반), 《추성부도》(1805)

 

김홍도(金弘道) 1745(영조 21)에 태어났다. 출신 가문은 원래 무반에서 중인으로 전락한 집안이라는 것만 확인되고,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그의 나이 7, 8세 때부터 경기도 안산에 있는 강세황(姜世晃)의 집에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어린 시절을 안산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강세황은 당대의 감식가이며 문인화가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로 시작하여 다음에는 직장의 상하 관계로, 나중에는 예술적 동지로 강세황이 세상을 떠나는 1791, 김홍도의 나이 47세까지 이어졌다.

김홍도는 강세황의 추천으로 이른 나이에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다. 20대 초반에 이미 궁중화원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1773년에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영조의 어진과 왕세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에서 근무했다. 1781(정조 5)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을 그릴 때 한종유(韓宗裕), 신한평(申漢平) 등과 함께 동참화사로 활약했으며, 이에 대한 포상으로 경상도 안동의 안기찰방을 제수 받았다. 이 무렵부터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를 따서 단원(檀園)이라 스스로 칭했다. 이는 그가 이유방의 문사로서의 고상하고 맑으며 그림이 기묘하고 아취가 있는 것을 사모한 데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조희룡의 『호산외사』에 의하면 “(김홍도는) 풍채가 아름답고 마음 씀이 크고 넓어서 작은 일에 구속됨이 없으니 사람들은 신선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강세황 역시 「단원기」에서 “단원의 인품을 보면 얼굴이 청수하고 정신이 깨끗하여 보는 사람들은 모두 고상하고 세속을 초월하여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적었다. 김홍도는 회화에서뿐 아니라 거문고, 당비파, 생황, 퉁소 등을 연주하는 음악가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일찍부터 평판이 높았던 서예가이고, 빼어난 시인이었다. 그의 작품에 고졸한 아취가 흐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멋과 문기(文氣)가 번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홍도는 1791년에는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일에 또 한 번 참여하게 되었고, 그해 12월 포상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에 발령받았다. 이는 중인 신분으로 그가 오를 수 있는 종6품에 해당하는 최고 직책이었다. 정조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김홍도는 충청위유사 홍대협(洪大協)이 조정에 올린 보고가 발단이 되어 만 3년 만에 연풍현감 자리에서 파직되었다.

1795
년 서울로 돌아온 김홍도는 그림에 전념했다. 그의 나이 51세로 원숙기에 접어든 그는 이때부터 단원화풍이라고 불리는 명작들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으로 행차하는 광경을 그린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조선시대 기록화의 기념비적 대작이고, 《을묘년화첩》과 《병진년화첩》은 우리나라 진경산수의 온화하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표현한 명작이다. 김홍도는 이전의 작품에서 보여준 화원다운 치밀함과 섬세함 대신 대가다운 과감한 생략과 스스럼없는 필묵의 구사로 단원
산수화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김홍도는 만년에 이르러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사경(寫景) 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 영모 등을 가미하여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배인 일상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그는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
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했는데, 화원이었던 그가 도석인물화를 많이 그리게 된 것은 당시 서민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도석신앙과 관계가 깊다. 굵고 힘차면서 투박하고 거친 느낌의 선이 특징인 그의 도석인물들은 후기에 오면서 화폭의 규모도 작아지고 단아하면서 분방한 필치를 띄게 되었다.

김홍도는 산수, 인물, 도석,
불화, 화조, 초충 등 회화의 모든 장르에 뛰어났지만 특히 풍속화를 잘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조선 후기 농민이나 수공업자 등 서민들의 생활상을 소재로 하여 길쌈, 타작, 대장간, 고기잡이 등 그들이 생업을 꾸려가는 모습과 씨름, 무동, 윷놀이 같은 놀이를 즐기는 모습, 빨래터와 우물가, 점심 등 서민의 삶과 정서에 밀착된 일상의 모습을 간략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그의 풍속화에는 박진감 넘치는 구성과 예리한 관찰, 그리고 인간적인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으며, 활달하고 건강한 한국적 해학과 정감이 묻어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흰 바지와 저고리를 입은 둥글넓적한 우리 서민의 얼굴이 한국적인 정취를 흠씬 느끼게 한다.

김홍도는 왕의 어진에서 촌부의 얼굴까지, 궁중의 권위가 담긴 기록화에서 서민의 삶의 애환이 녹아 있는 속화까지 신분과 장르를 아우르며 그림을 그렸다. 화가 신분으로 종6품에까지 오르는 세속적 출세를 맛보았고, 비록 말년에는 가난과 고독 속에 생을 마감했으나 일생동안 시를 읊고 고졸한 멋을 즐길 줄 아는 진정 위대한 화인이었다. 김홍도의 작품은 조선시대 우리 문화와 역사를 고찰하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으며, 동시대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아들인 양기(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
김득신(金得臣), 김석신(金碩臣), 이인문(李寅文), 이재관(李在寬), 이수민(李壽民), 유운홍(劉運弘), 이한철(李漢喆), 유숙(劉淑)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작품에는 《자화상》(18세기 중반), 《군선도》(1776), 《서원아집도》(1778), 《행려풍속도》(1778), 『단원풍속도첩』(18세기 후반), 《송월도》(1779), 《꽃과 나비》(1782), 《단원도》(1784), 《사녀도》(1784), 『금강사군첩』(1788), 《연꽃과 게》(1789), 『을묘년화첩』(1795), 『병진년화첩』(1796), 《마상청앵도》(18세기 후반), 《염불서승도》(1804), 《추성부도》(1805) 등이 있다.

참고:[네이버 지식백과] 김홍도 [金弘道]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73375&cid=40942&categoryId=34387

 

 

 

< 김홍도 >

 

김홍도(金弘道, 1745 ~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취화사(醉畵士)·첩취옹(輒醉翁)이다.[1]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는 그의 호 단원을 따온 이름이다. 정조 시대 때 문예부흥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여겨진다. 그는 산수화, 풍속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화가였지만 고사인물화 및 신선도, 화조화, 불화 등 모든 분야에서 독창적인 회화를 구축한 화가이기도 하다.[2] 주로 어명·고관의 명, 양반의 청탁 을 받아 그림을 그렸지만, 한편으로는 양반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 상민·중인·천민 등 일반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그린 풍속화가로 우리에게 주목받고 있다.[3] 또한 그는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니고, 시도 써서 아들 김양기가 출판한 《단원유묵》이라는 문집도 있다. 확실한 출생 등은 아무도 모른다.

  

생애

유년 시절

출생과 가계

김홍도는 1745년에 아버지는 김석무(金錫武)와 어머니 장담 문씨(長潭 文氏)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5대조부 김득남(金得男)은 수문장을, 고조부 김중현(金重鉉)은 별제를,증조할아버지인 김진창(金震昌)이 만호 벼슬을 지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을 보면 본래 무반이었던 듯하나 김홍도가 태어날 무렵에는 중인 집안이었다.[4] 할아버지는 김수성(金壽星) 부터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부인는 성씨는 알 수 없으나 선대가 역관·서리를 지낸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외아들 김양기(金良驥)도 산수화와 화조도를 잘 그린 화가이다. 김홍도의 호로 가장 유명한 "단원"(檀園)은 명나라의 문인화가 단원 이유방(檀園 李琉芳, 1575~1629)의 호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5] "단로"(檀老) "단옹"(檀翁)이라는 호는 모두 "단원"을 응용한 노년 무렵의 호다.[5] 그의 유년시절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김홍도에 관한 문헌인 오세창의 편저인 《근역서화징》속에 들어있는 〈호산외사〉에도 가장 중요한 김홍도의 생부모와, 형제관계, 본처와 자녀관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6] 강세황이 지은 《단원기》(檀園記)에만 김홍도가 젖니를 갈 나이 때부터 강세황의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화법(畵法)을 배웠다고 한다.[7] 이렇게 김홍도의 유년시절이 베일에 가려진 것은 〈호산외사〉를 저술한 조희룡(趙熙龍)이 김홍도를 평소에 숭배한 나머지 상세한 사실은 의식적으로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며,[8] 이러한 일들은 김홍도의 출신 성분이 중인이라는 점과 관련있어 보이는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9]

미술세계에 들어오다

한편 당시에는 화원세계는 무척 폐쇄적이었다. 그런데 김홍도의 가계로 보면 김홍도 집안에는 화원이나 사자관(寫字官) 출신이 없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그가 어떻게 강세황과 교제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다. 그러나 《화사양가보록》(畵寫兩家譜錄)을 참고하면 김홍도의 부친인 김석무(金錫武)의 장인, 즉 김홍도의 외조부는 장필주(張弼周)이고, 그가 속하는 인동장씨(仁同張氏) 집안은 대대로 화원을 낸 화원사회의 명문거족이다. 따라서 김홍도는 외가에 드나들다 자신의 화재(畵才)가 돋보여 강세황을 비롯한 화원세계에 소개되었으리라.[5]

강세황의 만남

강세황은 시(), (), ()에 능했으며 당시 최고의 감식안으로서 김홍도의 화업에 많은 도움과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강세황은 정조의 신임을 두텁게 받아 김홍도가 정조의 어진(御瞋)을 제작하는 명예를 누리도록 해주었는데, 이것은 화원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5] 또한 강세황은 말년에 이르러 김홍도를 가리켜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10] 이라고 극찬하고 화제(畵題)를 써주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의 관계가 매우 밀접했을 것이라 학자들은 짐작하고 있다.[11]

강세황의 칭찬[편집]

강세황은 김홍도의 재능을 이렇게 칭찬하였다.

단원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 하는 것이 없었다. 인물, 산수, 신선, 불화, 꽃과 과일,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妙品)에 해당되어 옛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했다. 또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을 잘 그려내어 공부하는 선비, 시장에 가는 장사꾼, 나그네, 규방, 농부, 누에 치는 여자, 이중으로 된 가옥, 겹으로 난 문, 거친 산, 들의 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꼭 닮게 그려서 모양이 틀리는 것이 없으니 옛적에는 이런 솜씨는 없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종이에 그려진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공력을 쌓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할 수 있는데,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천부적인 소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 강세황

 

 

 

전기 생애

이처럼 강세황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한 김홍도는 20대에서 부터 이미 화명(畵名)이 높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대략 1773(영조 49)경에 29세의 나이로 영조 어진 및 왕세손 이산의 초상화 제작에 동참화사로 참여하여 그렸다고 생각되는 것인데, 이것은 화원으로서의 재능이 여간 인정받지 않고서는 하기 어렵고 그만큼 명예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홍재전서》를 보면 정조의 말씀으로 "김홍도는 그림에 교묘한 자로 그 이름은 안지 오래이다. 30년 전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회사(繪事)에 속한 일은 모두 홍도로써 주장하게 하였다." 고 하였으니 일찍이 화단에 자신의 이름을 날렸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13]

 

그는 영조의 어진을 그린 공으로 1773년 장원서(掌苑署) 별제(別提)로 임명되며, 30세 되던 해인 1774년에는 왕실 소유의 원포(園圃)와 채소재배를 관장하는 사포서(司圃署)에서 종6품의 관직인 별제(別提)로 임명받게 된다. 그리고 1776년에 왕세손이 영조를 이어 정조로 보위에 오르자, 정조에게 《규장각도》를 바쳤고, 1781(정조 5)에 어진화사(御眞畵師)로서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공으로 김홍도는 와서(瓦署) 별제로 임명된다.[14]

 

이 무렵 김홍도는 [신선도] [군선도], [선동취적], [생황을 부는 신선] 등의 신선도와 [서원아집도], [평생도] 등의 인물화, 그리고 [서당], [씨름], [타작], [우물가] 등의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4]

 

 

정조와 김홍도

 

김홍도는 영조 말년에 세손(정조)의 초상화를 제작한 것을 계기로, 자신의 재능을 알아본 정조로부터 많은 배려와 관심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5] 김홍도와 정조와의 관계는 조희룡의 《호산외사》 속에 "정조 때에는 화원의 공봉(供奉)으로 관내에서 그림을 그려 올릴 때마다 매번 칭찬을 받고 곧 왕지(王旨)에 맞았다." 또는 "임금께서 금강산 사군(四郡)의 산수를 김홍도에게 그리라고 명하고 관용으로 조석(朝夕)을 받들게 하니, 이는 이수(異數)의 대접이었다."라는 기록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16] 또한 정조는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에서 김홍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김홍도는 그림에 솜씨 있는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가 오래다. 삼십 년쯤 전에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홍도를 시켜 주관케 하였다.   

  

— 정조의 어제문집, 《홍재전서》, 〈삼가 주자 선생의 시에 화운함〉, 시의 말미에 첨부된 협주(夾註)

  

 

후기 생애

 

김홍도의 후기 작품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40세 되던 해인 1784년에 그린 《단원도》이며 이 때부터 "단원"이라는 관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중인인 김홍도가 명나라의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를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은 후기의 그의 새로운 심적상태를 반영한 것이다.[18] 40세가 되던 해인 1784년에는 경상도 안동의 안기역(安奇驛) 찰방(察訪)[19] 이 되어 2 5개월 간 근무하였다. 1790년에는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와의 정치적인 대립으로 죽은 사도세자를 위해서 지은 사찰인 용주사 대웅전에 운연법으로 입체감을 살린 삼세여래후불탱화를 그렸다. 48세가 되던 해인 1791년에는 충청도 연풍의 현감으로 임명되었다. 충청도 연풍에서 현감으로 일한 경험은 김홍도가 민중들의 삶을 중국의 영향을 받는 대신 자신만의 개성으로 그려내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1796년에는 용주사 부모은중경의 삽화, 1797년에는 정부에서 찍은 오륜행실도의 삽화를 그렸다.

 

김홍도가 51세의 나이가 되던 1795년에남의 중매나 일삼으면서 백성을 학대했다.”는 충청 위유사 홍대협의 보고로 만 3년만에 파직됐다.[4] 연풍 현감에서 해임되어 한양으로 올라온 김홍도는 다시 화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김홍도는 50대의 나이로 관직 생활 이후에 자신의 독특한 화풍을 정립해가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이게 된다. 이 시기 그는 도화서의 공적인 일 이외에 사적인 주문에 의한 작품도 활발하게 하였고, 부드럽고 서정적인 필치로 그린 그의 작품은 인간적으로나 화가로서나 원숙한 모습을 보여준다.[20]

 

이렇듯 많은 그림을 그렸고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이름이 높았지만, 그의 삶은 어려웠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지필묵이 부족했을 정도로 가난했던 적도 있지만, 생활에 크게 구애받는 성격은 아니었다. 조희룡의 《호산외사》는 이런 김홍도의 모습을 잘 전해주는 유명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4]

 

집이 가난하여 더러는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파는데 아주 기이한 것이었다. 돈이 없어 그것을 살 수 없었는데 때마침 돈 3천을 보내주는 자가 있었다. 그림을 요구하는 돈이었다. 이에 그중에서 2천을 떼내어 매화를 사고, 8백으로 술 두어 말을 사다가는 동인들을 모아 매화음(梅花飮)을 마련하고, 나머지 2백으로 쌀과 땔나무를 사니 하루의 계책도 못 되었다.   

  

— 조희룡, 《호산외사》

 

 

노년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한데다가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그와 교류하던 후원자인 김한태도 별세하여 그는 후원자를 모두 잃고 생활이 어려워졌다.[22]

 

김홍도가 정확히 몇 년에 사망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1805 12월에 쓴 편지가 전하고, 이후 행적과 작품이 일절 전하지 않아 예순한두 살이던 1805년이나 1806년 사망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4] 그의 아들 김양기도 아버지를 이어 화원이 되었다.

 

  

김홍도의 교류

 

김홍도는 매우 폭넓은 사람들과 다양한 교류를 했다. 이를 통해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도 문학, 철학, 음악 등 다방면의 소양을 닦아 화가로서의 성장에 큰 도움을 받았다. 김홍도가 교유한 인물들의 가장 큰 특징은 남인과 중서출신 문사들과의 교류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는 남인들 중 스승이 되어준 강세황과, 문단의 지도자 이용휴, 정범조(丁範祖:1723~1801), 정란(鄭瀾:1725~1791) 등과 많은 교류를 했는데, 이들은 전기 김홍도의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중서인으로는 홍신유(洪愼猷, 1724~?)와 같은 여항문인들과 연암 박지원 같은 북학파 문인들이 있다. 남인들이나 여항문인, 그리고 북학파의 사실적 문학이론은 당대의 시대적 풍조를 형성한 동시에 김홍도의 풍속화나 진경산수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김홍도의 교류

 

김홍도는 매우 폭넓은 사람들과 다양한 교류를 했다. 이를 통해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도 문학, 철학, 음악 등 다방면의 소양을 닦아 화가로서의 성장에 큰 도움을 받았다. 김홍도가 교유한 인물들의 가장 큰 특징은 남인과 중서출신 문사들과의 교류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는 남인들 중 스승이 되어준 강세황과, 문단의 지도자 이용휴, 정범조(丁範祖:1723~1801), 정란(鄭瀾:1725~1791) 등과 많은 교류를 했는데, 이들은 전기 김홍도의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중서인으로는 홍신유(洪愼猷, 1724~?)와 같은 여항문인들과 연암 박지원 같은 북학파 문인들이 있다. 남인들이나 여항문인, 그리고 북학파의 사실적 문학이론은 당대의 시대적 풍조를 형성한 동시에 김홍도의 풍속화나 진경산수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그림의 특징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배경은 은은한 먹으로 강조하였다.

조금 짙은 먹으로 그린뒤, 거기에다 나무와 바위 등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가볍게 점을 찍었다.

수묵채색화

 

무동(舞童, 춤추는 아이), 서당, 나룻배, 씨름 등을 수록한 풍속화첩을 발표하여 민중의 삶을 다룬 작품활동을 하였다.

  

 

회화적 성과와 영향

 

그는 김응환에게 사사했으나 강렬한 개성으로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여 한국적인 풍토 감각을 잘 표현했다. 풍속화에서는 해학과 풍자를 조화하여 서민적인 풍취도 그렸고, 채색의 농담(濃淡)으로 형체의 원근·고저를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화단에 고착된 중국 북화(北畵) 양식을 탈피하여 대담하게 남화 양식을 시도해서 신선한 조형미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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